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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아프간 오지 진료 40년, 세브란스 어린이병원장 김동수

"여긴 알카에다 무섭다죠?" "나도 쟤도 알카에다인데…"

의대 때부터 나환자촌 찾아 다녔죠
유학 뒤 한국 상황 좋아졌더군요
그 뒤 해외 재난ㆍ전쟁지 진료 나서

한번 나가면 자꾸 또 나가게돼요
돈 벌려고 의사 한다?
그게 아니죠, 의사는 ‘소명’이죠


그의 청진기엔 국경이 없다. 특공대도 간담이 서늘한 곳. 잠시 총탄이 잦아든다. 주사와 약을 들고 격전지 복판에 몸을 던진다. 언제 죽을지 모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그렇게 누볐다. 의사 김동수(58)의 인생이다. 지진·폭풍 후의 폐허와 무의촌(無醫村)도 단골무대다. 짬만 나면 그런 땅에 달려간 지 40년째. 그는 왜 힘든 여정을 멈추지 않는 걸까. ‘터지면 간다’는 별명까지 붙은 신촌 세브란스병원의 김동수 어린이병원장을 만났다.

알카에다 두목을 치료하다

-오지와 전쟁터 진료로 유명하다. 아프가니스탄에도 갔다는데.

  “전쟁 직후인 2002년이었다. 아프간 북부의 마자르 이 샤리프와 발크로 진료를 떠났다. 원래 비자도 얻기 힘들었다. 접경국가인 우즈베키스탄의 아는 소아과 의사를 통해 어렵게 비자를 구했다. 입국한 뒤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났다. ‘여긴 알카에다가 무섭다고 하던데’라고 물었다. 대답을 듣고 머리가 쭈뼛 섰다. ‘나도 알카에다고, 쟤도 마찬가진데….’ 그들 도움이 없으면 진료가 어려울 것 같았다. 용기를 내 알카에다 본부라는 저택을 찾아갔다.”

-무섭지 않았나.

  “모두 총을 들고 있었다. ‘대장을 만나고 싶다’고 청했다. 2층으로 데려가더라. 두목부터 간부들이 쫙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우즈베크 말을 잘 했다. 같이 간 동료 의사와 말이 통해 금세 친해졌다. 사진도 같이 찍고, 하하. 두목이 ‘콩팥이 나쁘다’고 하더라. 등과 허리가 아프다면서. 즉석 소변검사를 해줬다. 당도 없고, 단백도 없어 괜찮다고 알려줬다. 근육통을 착각한 것이었다. 그렇게 본부를 나오니 진료가 한결 수월해졌다.”

-보통 사람이면 간이 콩알만 해졌을 텐데.

  “깜짝 놀란 일도 있었다. 다음날 보건소에 가니 환자들로 인산인해더라. 대기표를 나눠주는데, 서로 먼저 받으려고 아우성이었다. 알카에다인지 갑자기 바닥에 총을 쏘더라. 질서를 지키라고 말이다. 가슴이 뜨끔했다. 진료를 마치고 가는데 알카에다가 차를 세우더니 태워 달라고 한 적도 있다. 안 된다고 했더니 차에다 총을 막 쏘더라, 어휴.”

-이라크도 위험할 때 들어갔다.

  “2003년이었다. 이라크에 대한 연합군 공격이 끝나지 않았을 때였다. 세브란스병원 의사 6명이 대원으로 입국했다. ‘알리바바(강도를 지칭)’ 조심하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현지에선 돈도 나눠 양말 같은 곳에 숨기고 그랬다. 바그다드로 가는데 낯선 차량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를 잡으려 하다 결국 실패했다. 뒤에 일본 취재팀 차량이 오고 있었는데 나중에 바그다드에 도착해 들어보니 카메라와 돈을 털렸다고 하더라.”

-총탄이 오가는데 진료가 되나.

  “열심히 치료했다. 그때 우리는 허름한 숙소에서 묵었다. 고생하는 대원들 사기를 북돋우려고 쉐라톤 호텔에 가서 밥 사주는데 언제 머리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심정이었다. 자려고 누우면 밖에서 조명탄이 ‘슈욱’ 하고 올라오고 곧 총격전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진료하고 가면 50m 앞에서 미군 헬기가 기관총을 쏘고 있고. 영화 같은 장면이 늘 눈앞에 있었다. 대원들 안전 생각에 밥 못 넘기는 날이 많았다.”

-군인도 아닌데, 사지(死地)를 자원해 찾아가는 힘은 어디서 나오나.

  “기독교 신앙도 있지만, 내가 늘 하는 얘기가 있다. 한번 갔다 오면 또 가게 된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다. 어떤 사명감 같은 것? 뭔가가 나를 자꾸 끌어 당긴다. 농담처럼 그런다. 마약보다 심한 중독이라고.”

  김동수 병원장은 얼마 전 제약사 화이자 주관으로 ‘대한의사협회 화이자 국제협력특별공로상’을 받았다. 세계의 오지와 전장을 찾아 숱한 생명을 구한 업적을 인정받았다. 2005년엔 세계의사회로부터 ‘참된 의사’로 뽑히는 영예도 안았다. 다른 의사들도 그의 희생을 특별히 높이 산 것이다.

김제 나환자촌의 충격

-편하게 살 수도 있지 않나. 언제부터 전투적 진료 봉사에 나섰나.

  “1971년 연세대 의대에 입학한 뒤 이듬해 여름 처음으로 단양에서 무의촌 진료를 경험했다. 그러다 본과 1학년 때였다. 전북 김제의 나환자촌에 갔다. 사진으론 봤지만 실제로 접한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나환자들은 눈썹이 빠지면 이식 수술을 한다. 머리카락을 심는다. 그런데 초기엔 눈썹이 앞으로 뻗어서 자란다. 진료하며 환자 얼굴을 보는데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돕겠다고 왔으면서 이게 뭔가’ 반성을 크게 했다. 사회에 이런 분이 많다면 도와야 된다고 생각했다. 가을 학기 내내 주말마다 나환자 정착촌에 다녔다. 그때만 해도 용인·광주·원주 등에 그런 곳이 많았다.”

-의대 수업과 병행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맞다. 성적이 뚝뚝 떨어졌다. 주말에 봉사하느라 지쳐서 주중엔 강의실에서 졸았으니.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독재 반대 시위가 많았다. 나도 친구들과 데모하다 서대문경찰서에 잡혀 가기도 했다. 학교가 시끄러워지면서 강의도 없고, 일찍 종강되는 바람에 2학기 성적을 낼 수 없었다. 1학기 성적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하하.”

-군의관 때는 봉사를 못 했겠다. 제약이 많으니.

  “처음에 강원도 현리에서 근무했다. 소아과를 전공했으니 밤에 찾아오는 민간인 아이가 많았다. 다 돌봐줬다. 3군단장이 표창을 하더라. ‘현리의 슈바이처’란 쑥스러운 별명도 붙었다.”

-의사 선배로서 슈바이처는 어떤 존재인가.

  “초등학생 때 슈바이처 얘기를 처음 들었다. 65년에 돌아가셨다. 영향을 참 많이 받았다. ‘그런 사람처럼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배재고를 나왔는데 그 학교도 남을 섬기라고 강조했다.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欲爲大者 當爲人役)’는 교훈이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의사가 돼야겠다는, 그것도 소아과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원래 아이들을 좋아하나.

  “예쁘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 우는 소리 듣기 싫지 않으냐’고 묻는다. 레지던트 때 겪은 일화가 있다. 애가 갑자기 숨을 안 쉬었다. 밤새 공기주머니처럼 생긴 앰부 호흡기를 물리고 홀딱 새웠다. 새벽이었다. 애가 ‘왕’ 하고 울더라. 그 소리가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해외 봉사로 눈 돌린 까닭이 궁금하다.

  “미국에서 3년 공부하고 온 뒤 89년에 화천으로 진료를 나갔다. 충격을 받은 게 옷매무새며, 아이들 영양 상태, 의료 혜택이 엄청 나아져 있었다. 이전의 무의촌 봉사 같은 원초적 진료는 의미가 많이 줄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외를 떠올렸다. 97년인가 터키 지진이 일어났다. 그 다음부터 이상하게 재난이 계속 터졌고 그때마다 짐을 쌌다.”

-기억 나는 환자가 있나.

  “신기하게 매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터키 지진 때도 그랬다. 어린이 간염 환자가 있었다. 눈자위 황달이 심했다. 격리를 위해 ‘병원에 데리고 가서 입원시키라’고 했더니, 아버지가 ‘지진으로 아내와 집 다 잃고 애만 업고 뛰쳐나왔는데 무슨 돈이 있느냐’며 매달렸다. 응급 조치로 링거 달고 눕혀만 놨다. 30분 정도 지난 뒤 깜짝 놀란 게 황달이 눈에 띄게 약해진 것이다. 이럴 수가 있나, 생각했다. 다른 의료진한테도 아이 좀 보라고 소리쳤다. 아이는 한 시간 뒤 일어나더니 배 고프다고 빵까지 달라고 하더라. 나흘이 지나 ‘치료 끝났다’고 하니, 아버지가 ‘당신은 우리 딸의 영원한 주치의’라며 머리를 연방 굽히더라.”

-쉽지 않은 삶을 사는데, 인생의 롤 모델은 누군가.

  “슈바이처다. 독일의 그 풍요한 삶을 놔두고, 아프리카 오지에서 자신을 불살랐다. 나는 ‘공부해서 남 준다’고 생각한다. 남을 주면 자기는 어떻게든 살아가게 돼 있다.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말한다. 돈 벌려고 의사 한다? 당장 그만두라고 말이다. 돈 벌려면 삼성그룹 같은 데 들어가라고 한다. 친척 한 명이 서울대 공대 나와서 삼성 부사장인데 엄청 많은 봉급을 받더라. 나는 ‘의사는 직업이 아니라 하늘이 내린 소명’(Doctor is not a job, but a mission)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글=김준술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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