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장효조 '타격의 큰 별' 이 지다
한국프로야구의 ‘영원한 리딩 히터’ ‘타격의 천재’ ‘영원한 3할 타자’였던 장효조 감독이 간암과 위암 판정을 받은지 한달 만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쉰 다섯. 이제부터 지도자로써 한창 실력을 발휘할 시기에 팬들과 야구장을 영원히 떠나버린 것이다.장효조가 세상을 떠나던 날 그가 십 년 이상 누비던 달구벌(대구의 옛 지명)에 위치한 대구 시민 야구장은 숙연한 분위기 가운데 고인을 위한 묵념을 시작으로 대구구장의 전설인 고 장효조 감독을 기렸다. 장 감독은 부산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가 처음으로 야구배트를 잡은 때는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러나 키가 워낙 작아 입단을 거부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우여곡절 끝에 대구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 때부터 장효조는 이를 악물고 상대 수비진의 빈틈을 노리는 타격을 연습한다.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타자였던 장훈 선수의 대명사인 일명 ‘부챗살 타법(Spray Batting)’을 혼자서 익혔던 것이다.
프로선수들도 하기 힘든 기술을 중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에 혼자서 터득하면서 달인의 경지에 올라 천재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몸쪽 공은 끌어 당기고 바깥쪽 공은 밀어치면서 상대 수비의 빈 공간을 찾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타구를 날려보내 세 번의 타석에서 한번은 안타를 만드는 놀라운 기량을 발휘하게 된다.
이러한 실력을 바탕으로 4할과 5할이라는 경이로운 타율로 김한근과 원투 펀치를 날리며 강태정 감독이 이끄는 대구상고의 전국대회 3관왕이라는 전성기를 열어가면서 ‘기동성 야구’의 효시가 된다.
한양대를 거쳐 포항제철에서 아마시절을 보냈다. 1977년 한양대 3학년 재학 시절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 월드컵 대회와 1982년 서울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국가대표4번 타자로 활약하면서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장효조는 타격의 천재답게 방망이에 대한 욕심이 많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산 야구배트의 품질이 일본 제품보다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방망이를 특별 주문제작한 것을 수입해서 사용했었다. 이때 다른 선수들이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한 후 제일 좋은 배트를 먼저 고른 후에야 후배들에게 양보했던 이야기는 아직도 후배들에게 입에서 오르내리는 일화이다.
그리고 집안에 배트 보관실을 따로 마련해 놓고 방망이가 건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햇빛을 차단시켜 보관하고 월별로 분리해 놓은 배트 중에서 상태가 제일 좋은 배트를 골라 경기에 임하는 프로 정신이 투철한 선수이기도 했다.
이러한 프로정신은 성적과도 연결되어 프로야구 데뷔 때부터 수위타자가 되는 영예를 안게 되고 지금도 깨지지 않는 3년 연속 수위타자로 등극하는 전설을 남긴다. 그 때 생긴 유행어가 ‘효조는 방망이를 거꾸로 들고 쳐도 3할은 친다’ ‘효조가 안 때리면 무조건 볼이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의 통산 타율이 3할3푼1리로 아직도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팬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타고난 천재임에는 틀림없지만 또한 엄청나게 노력했던 선수라는 점이다. 에디슨의 말처럼 99퍼센트의 노력이 전설의 타격왕 장효조를 만든 밑거름이었다는 것이다. 이점이 고인이 남긴 후배들을 위한 가장 훌륭한 교훈이라 생각된다.
글·사진=김태원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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