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불멸의 사나이, 산사람 되다 -고 박영석 대장 영전에
박상윤/뉴욕한미산악회장
지난해 뉴욕한미산악회에서는 청소년 여름캠프를 개최하면서 박영석 대장을 초청하였다. 이미 세계적인 유명인이 된 박영석 대장의 초청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공인으로서의 바쁜 일정과 우리의 캠프일정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박영석 대장은 해외동포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을 위하여 자신의 일정을 조정해 주어 우리의 초청행사를 성사시켜 주었다.
공항에서 처음 만난 박영석 대장의 첫 인상은 소박했다. 한국에서부터 구면인 선배들과의 만남뿐만이 아니라 초면인 다른 회원들과의 첫 만남 속에서도 스스럼없이 곧 구면인양 친숙해졌다. 바쁜 일정으로 다음 날부터 언론사 방문이 잡혀졌다. 산행 기록과 에피소드 등 원만한 진행을 위하여 박영석 대장에 대해 몇 가지 사전 자료준비를 했다.
그 참고기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박영석 대장은 ‘산악인은 산에 있을 뿐’이라며 유명해진 이후에도 방송 출연 등의 외부활동을 절제하여 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뉴욕의 방송에 나가면 옆에서 보조를 잘해 주는 것이 좋겠다는 측근의 전언이 있었다.
첫날 라디오 방송사에 갔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생방송을 하였다. 그런데 이미 정상에 선 박영석 대장의 확신에 찬 구변은 청산유수처럼 맑고 막힘이 없었다. 이후의 외부 스케줄에 대해서는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어졌다. 방송을 끝내고 “박 대장! 솔직히 조금 걱정을 했는데, 참 말을 잘하더라”하였다. 그는 웃으며 2003년 출판된 ‘산악인 박영석 대장의 끝없는 도전’이라는 표제의 자서전을 건넸다. 이 자서전 속에 자신이 피력하였던 말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방송에서 했던 그의 말들은 그 동안 죽음을 동반한 어려운 등반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고스란히 체득된 박영석 대장의 살아있는 인생철학이며 산을 향한 등산철학이었다.
다음날 급히 공항을 가야 할 일이 생겼다. 박 대장의 부인이 “어떻게 혼자서 뉴욕을 갔냐”며 전화 한 통화 하고는 따라왔다. 이번 행사를 마치면 또 다른 북극탐험을 하기 위해 몇 개월 다시 집을 떠나야 하는 원정계획이 잡혀 있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귀중한 가족생활의 시간을 빼앗은 것 같아 오히려 미안했다.
불편한 캠프생활이 시작됐다. 그래도 박대장의 부인은 남편과 함께 있는 것이 오히려 즐겁기만 한양 주방 일을 거들었다. 한동안 식당 운영을 하여서인지 보통 솜씨가 아니다. 캠프생활은 6시에 기상을 하고 학생들은 6시30분이면 아침 체조를 하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박 대장은 언제 일어났는지 학생들과 함께 체조에 열중이었다. 여독에 좀 더 쉬라 하여도 “학생들과 함께하기 위하여 여기에 왔노라”하며 미소로 대답했다.
캠프 기간 동안 일과 후 저녁 2시간은 박영석 대장에게 할애되었다. 박영석 대장은 학생들에게 많은 애기를 해 주었다. 그 가운데 “나는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라고 주창한 박영석 대장의 희망을 위한 불굴의 도전정신은 이제는 다시 직접 들을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어버렸다.
과연 무엇 때문에 ‘세계 최초의 산악 그랜드슬래머 박영석 대장’은 영원한 산사람이 된 걸까. 작년 캠프에서 산악회의 대학산악부 출신의 후배들을 모아 놓고 그는 말했다.
“나는 나를 만들어 준 대학 산악부와 온 국민이 성원하여 준 우리나라에 너무 고맙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속적으로 산을 가는 일밖에 없다.”
그의 말 그대로 박영석 대장은 안나푸르나 남벽 코리안 신 루트 개척에 혼신을 다했던 것 같다. 끝까지 산처럼 순수하게 살다가 산에서 산화한 박영석 대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산악인으로 우리 가슴에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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