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글마당] 아버지의 여자들

이수임(화가·브루클린)

“내가 만나는 여자 친구다. 인사해라.” 고개 숙여 인사하며 여자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훑었다. 아버지보다 스물다섯살 정도 어린듯 했다. 엄마가 돌아가신지 6개월 만에 아버지에겐 여자가 있었다. 남편 잃고 아이 넷을 키우며 고생하는 여자를 도와주며 사귀기로 했다는 것이다. “착하고, 음식 솜씨 좋고, 뜨개질도 잘하고 재주가 많은 아주머니다. 네가 미국에서 나오는 줄 알고 네 스웨터를 벌써 만들어 놨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 말해라 만들어 줄꺼다.”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흥분한 아버지를 생전 처음 봤다.

아버지와 아줌마 그리고 갓 결혼한 우리 부부, 이렇게 넷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속리산을 거쳐, 안동을 지나, 경주 불국사 그리고 백암온천까지 갔다. 돌아가신 엄마에게는 미안했지만 홀로 계신 아버지에게도 효도해야 하니 어쩌겠는가. 아버지가 하자시는대로 따랐다.

한국에 나갈 때마다 아줌마는 나에게 잘했다. 아버지와도 15년 넘게 잘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잠적했다. 아버지가 남산을 오르다가 다리를 다쳐 누웠기 때문이다. 누워 있는 아버지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듯 했다. 그러나, 워낙 건강하신 아버지는 곧 완쾌되었다. 아줌마를 잊지 못해하는 아버지가 안스러웠다. 나는 한국에 나가 그녀의 거처를 수소문했다. 그녀를 알고 있다는 충청도의 한 식당을 아버지와 함께 찾아가기까지 했다. 온종일 기다렸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인사해라, 아버지 걸프렌드다.” 세련되고 참한 분을 나에게 소개했다. 아버지는 그 동안 일본인 아줌마, 미국에서 살다 나간 아줌마도 사귀었다. 아마 내가 모르는 나보다 어린 아줌마도 있었을 것이다. 홀로 계신 아버지가 외롭지 않게 즐거운 여생을 보내실 수 있다면 난 누구든 다 좋았다.

몇 년이 흘렀다. 어느 날 밤중에 누가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내다보니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 아줌마였다. 그녀는 엄청 뚱뚱한 모습으로 문 앞에 떡 하니 서 있었다. 아버지는 집 안으로 들어오려는 그녀를 제지하더니 ‘맥도날드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부지런히 집안에 있는 돈을 다 챙겨서 맥도날드로 나갔다. 아줌마는 ‘잘못했다’고 빌며 ‘다시 돌아오겠다’며 눈물짓더란다.

“한번 떠난 인연은 다시 이어질 수는 없다. 어디에서든 잘 살아라”라며 챙겨간 돈을 주니 서럽게 울면서 가더란다. 그녀는 뉴욕에 있는 나에게도 한밤중에 국제전화로 ‘아버지의 마음을 돌려 달라’며 하소연하기도 했다.

“아버지! 왜 아줌마들과 사귀기만 하고 결혼은 안 하세요. 결혼하세요!” “오십 넘은 여인네들 크고 작은 지병들이 있어! 내가 좀 편하기를 바라고 호적에 올렸다간 되레 그들 병 시중 들게 된다.” 이어서 아버지는 말했다. “내 생에 결혼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네 엄마에 대한 최소한의 나의 예의다.”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