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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고 라운드] 첫 한인 미국 시민권자 서재필

김성혜/작가·맥클린

중고등학교 시절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문을 세운 서재필을 국사 시간에 외우느라 고생했었다. 또 김옥균, 박영효와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서재필도 외워야 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컨대 성적이 떨어질가봐 걱정이 되어 외웠지 무얼 알거나 재미있어 달달 외웠던 것은 아니다. 아둔했던 어린시절의 머리로는 독립신문이 먼저인지 갑신정변이 먼저인지조차 몰랐다. 의례 ‘갑신정변에 실패한 자들은 모두 삼족이 멸했으려니…’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지났을 뿐이었다.

 잠시 필라델피아에 살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교회 장로 한 분이 “여기에서 서재필 선생이 살았었다”라고 얘기해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1994년 한국에 나갔을때 남편이 일했던 병원 건물이름을 서재필 선생의 호인 송재를 따서 송재관이라고 불렀다.

 그때 궁금해 서재필 선생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가 태어났다는 전라남도 보성도 가보고, 1884년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피신했던 서재필이 미국으로 가 망명생활을 하게 된 것도 알았다. 그의 일생은 당시 우리나라 역사와 다름없이 어렵고, 힘들고, 다사다난했지만 그러면서도 ‘인물은 인물이었구나’ 하는 연민의 마음을 심어주기도 했다.

 그는 18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해 관직을 갖게 됐다. 그리고 김옥균을 만나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물론 그가 한 일이 역모죄였으므로 그의 집안은 멸문이 되었다.

 영어도 모르고 미국의 문화도 몰랐던 그는 고생에 고생을 거듭해 펜실베이니아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워싱턴에 있는 조지워싱턴 의대에 입학해 의사가 됐다. 26세가 되던 해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그는 한국인으로 첫 미국 시민권자이자 서양 의사가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놀랐던 것은 그가 결혼한 부인 뮤리엘 암스트롱 때문이었다. 그가 어린시절 보성에서 결혼했던 첫 부인은 갑신정변 이후 감옥에서 음독자살했고 젖먹이 아들은 일설에 의하면 독이 든 어머니의 젖을 물고 죽었다고 한다. 그러니 부인도 자식도 없었던 셈이다.

 미국시민이 된 후 30세가 되던 해 뮤리엘 암스트롱을 만나 결혼했는데 그녀는 미국 15대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뷰캐넌의 조카였다. 지금이라면 모를까 당시만 해도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이 엄청난 시절이었다. 서지필로서는 이름 없고 별볼일 없는 미국 여자와의 결혼조차 쉽지 않았을 터인데 아무리 전직 대통령이라고 해도 미국의 통수권자였던 정치인의 조카와 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뮤리엘의 친정 아버지는 철도우체국장을 지냈던 사람으로 유복한 집안의 딸이었다.

 눈에 무슨 콩깍지가 끼어 서재필과 결혼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그와 결혼해 두 딸을 낳아준 그녀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서재필은 고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가산을 탕진하고 끼니를 자주 굶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끝까지 내조하던 뮤리엘이 1944년 죽자 서재필은 무척 슬퍼했다고 한다.

 1948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대통령에 출마할 것을 권했지만 이를 사양한 서재필은 “내가 할 일은 다 했다”는 말을 남기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격동기에 태어나 숱한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다간 그가 한국 사람으로는 첫 미 시민권자라는 사실이 미국에 이민와서 살고 있는 내게는 위로도 되고 또한 자부심을 갖게 했다. 만난 적도 본 적도 없지만 한인 이민역사에 그가 있어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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