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발이 넓은 사람에 대하여
조현용 경희대 교수ㆍ한국어교육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아는 게 좋을까? 어떤 사람은 '누구도 잘 알고, 누구도 친하고'라는 말을 달고 산다. 나도 생각해 보면 그런 표현들을 많이 한 듯하다.
그런데 실제로 물어보면 1년에 한 번도 안 만나는 사람인 경우도 많고, 평생 몇 번 만난 적도 없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그 사람이 결혼을 했는지, 아이가 있는지, 고향은 어디인지, 사는 곳은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람들을 잘 안다고, 친하다고 하는 나의 심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경우를 속어로 '족보'를 세운다고 한다. 마치 자기 조상 중에 유명한 사람이 많으면 자기가 훌륭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처럼, 주변에 힘 있는 사람이 많으면 자신도 센 사람처럼 보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별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내게 힘이 되어 줄 리 만무하다. 막상 도움을 청할 일이 생겼을 때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최근에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유전적으로 약 150명과의 인간관계가 가장 자연스러운 사회집단이라는 이야기를 보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자연스럽다는 말에는 행복을 공유할 수 있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아마 예전 농경사회나 유목사회에서는 150명 정도의 인간관계면 충분했을 것이다. 평생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로 같은 마을 사람들이다 보니 더 많은 수의 인간관계가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사람들과 알콩달콩 살아가며, 서로의 일을 자기의 일처럼 품앗이하면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관계가 넓어지면 질수록 우리는 나 아닌 모든 사람을 남으로 만들게 된다. 웬만한 남의 슬픔은 내 슬픔으로 다가오지도 않는다. 150명 정도의 인간관계에 충실하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 수많은 인간관계에 얽혀 있으면서 그야말로 인간의 본성인 '서로 어우러짐'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가족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족 이기주의가 팽배하게 된 것이다. 우리 가족만 행복하면 된다는 가족 이기주의에는 '사촌'도 발붙일 곳이 없다. 점점 사촌도 남처럼 되어 버렸다.
교회나 성당, 절과 같은 종교 모임의 신도 숫자도 생각해 볼 일이다. 150명의 수를 넘어서면 서로 간의 따뜻함도 옅어지게 된다. 다른 문제점은 차치하고 서로 위로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 얼굴도 잘 모르고 지낸다는 것은 답답한 일이다. 학교에 반이 많은 것도 이러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한 학년에 학생 수가 900명에 이르렀다. 당연히 동창회도 잘 안 된다. 같은 반이 된 적도 없고, 학교에서 마주칠 기회가 적었던 학생들이 동창이라고 반가울 리 없는 것이다.
나는 발이 넓은 사람이 되기보다 아는 이에게 충실한 사람이 되자고 하고 싶다. '아는 사람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는 질'이 중요한 것이다.
내 일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해 줄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반대로 그의 일이 내 일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그게 좋은 인간관계다. 내 일을 자신의 일처럼 귀하게 생각할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150명은 정말 엄청난 숫자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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