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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기독교 유적을 가다 <5> 두아디라 (Thyatira)

버가모(Pergamum)와 사데(Sardis) 사이에 위치한 두아디라(Thyatira)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작은 도시중 하나였다. 서로 다른 시대였으면서도 매우 강성했던 두 왕국 사이에 위치해 있었던 관계로 두 지역의 중요한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지금은 아크히살(Akhisar)이라고 부르는데 관심을 끌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고대의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고 새로운 도시 분위기만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 도시 중심에 위치한 두아디라의 유적은 주택과 상업지역에 둘러 쌓여 있어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곳에 그리 크지 않은 페허만 덩그란히 남아있을 뿐이었다. 나즈막한 기둥들과 거의 허물어져버린 담들은 아마도 아폴로에게 제사를 지냈을 신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당시에 쓰였던 동전에 태양의 신인 아폴로가 새겨진 것으로 보아 그 시대에 가장 추앙을 받았던 신들중에 그가 단연 으뜸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기원전 132년 후부터는 로마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되어 황제 숭배사상이 팽배하게 되었는데 황제가 아폴로의 화신으로 동일하게 간주되어 신격화되었었다.

두아디라는 그 만큼 많은 조합을 가졌던 도시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구리 세공업자들, 청동제품 기술자들, 가죽제품 기술자들, 염색업자들, 양모나 린넨업자들, 옹기장이들, 빵굽는 자들 그리고 노예상인들과 같은 다양한 조합들이 있었다. 그 중 한 조합에 소속되어 있었던 루디아(Lydia)가 마케도니아의 빌립보(Philippi)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었는데 성경엔 “그 자리에는 두아디라에서 온 루디아라는 자색 옷감 장수도 있었다(행 16:14)” 라고 기록되어 있다.

자색은 달팽이로 부터 얻을 수 있는 아주 짙은 진홍색을 일컫는데 귀한 색이고 비쌌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살 엄두를 낼 수도 없어서 자주색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은 신분이 높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비잔틴 시대에는 ‘자주색으로 태어났다’라고 표현하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는 것을 의미했고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추기경이 된다는 의미로는 진홍빛 의관을 착용한다는 뜻과 같아서 ‘자주색으로의 승진’이란 표현을 쓴다.

요한계시록에는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 첫부분에 “눈은 불꽃 같고 발은 빛나는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말한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처음보다 지금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너에게 책망할 일이 있다. 너는 자칭 예언자라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고 있다.” 라고 적혀있다. 이 글을 쓴 사도 요한은 두아디라가 청동업으로 유명했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빛나는 주석’이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사벨은 그냥 익명일 수도 있으나 실제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이스라엘 왕이었던 아합(Ahab)의 아내였는데 이방인인 페니키아 사람으로 바알(Baal)우상을 섬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 녀는 시돈왕 엡발의 딸로 아합왕이 아세라상에 절하게 하였다. 또한 두아디라에는 삼바스라는 유명한 여점장이가 있었는데 교회에까지 와서 점을 쳤다고 한다.

두아디라 교회 시대는 외부적인 박해로 인한 위험보다 내부적인 방종과 도덕적 책임 결핍으로 인한 타락을 경종하고 있어서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깊은 생각까지도 살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두아디라에서 만났던 눈이 맑고 아름다운 여인을 잊을 수가 없다. 유적 주위 한 모퉁이에 있는 가전제품 가게 안에서 머리에 스카프를 쓴 여인이 예쁘게 웃길래 멜하바(Melhaba, 터키어로 Hello) 하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막 떠나려는데 손을 급히 흔들더니 시원한 아이란(Ayran, 요구르트와 물을 섞어 만든 터키음료)을 가져와 손에 쥐어주며 잘 가라는 것이었다. 더위에 지쳐 목마르던 차에 그것을 받아 들고 얼마나 감격하였던지. 며칠동안 빈 통을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다녔다. 다음에 올 기회가 있으면 꼭 그녀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리라 생각했지만 별로 볼만한 것이 없는 두아디라는 아마 다시 오게 될것 같다. 사람들의 따스한 마음은 어느 곳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뉴욕에서도 터키식당에 갈 기회가 있을 때면 빼놓지 않고 아이란을 시킨다.



<동부지역 크리스찬 유적>
소아시아 지역인 아나톨리아의 기독교 유적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들 중 하나로 터키 동부. 지금의 시리아 국경 근처이고 오곤테스 강가에 위치한, 지금은 안타키아(Antakya)로 부르는 안디옥(Antioch)이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통합하기 위한 대 전략으로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안디옥은 주요한 곳이었다. 그 후 크리스찬들이 들어 올 때에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시리아 지역의 수도였었고 로마의 동부 군사력 기지였었다.

특히 안디옥은 로마시대에 로마와 에베소,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4대 도시였으며 올리브 오일 램프를 이용 세계 최초로 가로등을 설치한 도시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에서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의 죽음으로 인하여 뿔뿔이 흩어지면서 수많은 무리들이 안디옥으로 피신하였었다. 그리하여 자연히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안디옥에서 그들을 처음으로 크리스찬이라고 불렀다. 사도들의 전도에서 그들을 도울 명망이 있는 일곱사람들을 뽑을 때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뽑아…”라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이 곳 출신이다.

바울, 베드로 그리고 바나바가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안디옥의 유대회당에서는 예루살렘에 있던 회당처럼 보수적이지 않아 안식일에 그리스어 구약성서인 70인 번역서를 사용했고 그리스어로 예배를 드릴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때문에 크리스찬 복음이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안디옥에서 부터 퍼지기 시작했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안디옥으로 가는 도로변엔 커다란 양파 자루들을 줄줄이 걸어놓고, 헤이즐넛이나 그 지역에서 유명한 무화과 열매들을 진열해 놓고 팔고 있었다. 그 곳에서 샀던 무화과 열매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어디서든지 달러를 받았는데 시골이라 1불에 한 보따리였다. 너무 잘 익어 껍질을 얇게 벗겨 먹으면 싱그러운 향내가 입안에 번져 눈이 스르르 감기는 것 만 같았다. 무화과는 말 그대로 꽃 없이 열매를 맺는 과일이라고 하여 처녀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였다는 성모 마리아를 상징한다고 한다.

또 한 곳으로는 바울이 태어난 다소(Tarsus)를 빼놓을 수가 없다. 다소의 역사는 기원전 3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지방의 전설에 의하면 아담의 아들 셋(Seth)으로 부터 시작되었다고도 주장한다. 그 이유는 한번도 도시가 버려지지 않았고 전쟁과 오랜 세월로 많이 파괴되었지만 옛 도시의 잔재들은 현재의 도시 10~65 미터 아래에 있다. 다소는 세상에서 고대로 부터 사람들이 거주해 오던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다소로 들어오려면 상인들이나 군대가 험한 협곡을 통과하는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북부 산악지역을 거쳐 처음으로 실리시안 문(Cilician Gate)을 통과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의 문이라고 부르는 유적이 다소시 입구에 있는데, 클레오파트라가 마크 안토니오를 이 곳 다소에서 만나 그를 유혹했던 곳이기도 하였고 이 곳에서 사랑을 나누었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운다는데, 사실상 클레오파트라와 이 문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한다.

기원전 41년에 마크 안토니오는 빌립보에서의 승리로 반대편을 도왔던 이집트의 여왕을 혼내 주려고 다소에서 별렀었다. 그리스의 역사가였고 영웅전 작가로 유명했던 플루타크(Plutarch, 46 ~120 )에 의하면 클레오파트라의 도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금을 입힌 고물로 된 유람선은 자줏빛 돛을 달고 플룻, 피리와 거문고를 타면서 은으로 만든 노를 저으며 시드누스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데 큐피트로 분장한 소년들이 그녀의 양 옆에서 부채질을 하는동안 금으로 반짝거리는 차일 밑에 클레오파트라는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와 같은 옷을 입고서 비스듬이 누워있었다.” 안토니오는 너무 매혹되어서 그녀를 꾸짖는 것도 잊어버렸을 뿐 만 아니라 아나톨리아의 광대한 해안지역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로부터 몇 십년이 흐른 뒤에 다소에선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멀게 되고 예수를 만나게 된 유대인이고 천막을 만드는 직업을 가진 사울이 태어난다. 오래 된 다소의 좁은 거리를 걸어 들어가면 사도 바울의 우물이 나오고 그 옆에 수 미터 깊게 파여진 곳에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새겨진 옛 집터를 플라스틱 유리를 통해 볼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의 부모는 천막 만드는 직업을 가져서 비교적 부유했을 것이라고 한다.

천막이란 카페트를 짜는 것을 말하는데 사실 그 곳 사람들은 카페트로 천장, 바닥과 벽을 장식하며 큰 재산목록이 되어서 지금도 여자들은 카페트를 짜서 결혼 지참금과 생활비를 번다. 현재의 사도 바울의 터도 확실하게 그의 집이라는 증거는 없지만 그 당시의 우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장 근접하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부자들만 우물을 가지고 있어서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이 부잣집에서 물을 길어다 썼다고 하니 그들의 생활 중심이 되었으리라 짐작해 보았다. 지금도 두레박으로 퍼올려지는 그 물을 마셔보니 아주 시원했다.



윤명희

여행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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