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인의 읽는 클래식 듣는 문학] 세 개의 크로이처 소나타

그런데 85년 뒤, 톨스토이는 베토벤의 걸작을 소설의 소재로 활용한다.(중편 ‘크로이처 소나타’) ‘베토벤의 피아노’처럼 자유를 꿈꾸는 어떤 정신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사회의 통념이 이를 억압한다면? 음악에서야 전능한 작곡가가 지혜롭게 자유와 조화를 실현하겠지만, 부조리가 팽배한 사회에서도 그런 일이 가능할까.

차라리 모차르트였다면 파국을 피했으리라. 하지만 ‘크로이처’는 얌전한 작품이 아니다. 적극적인 응답을, 함께 악상을 만들어가는 자발성을 요구한다. 몸을 달아오르게 할 만큼 난도도 높다. 그러나 아무리 음악이 질투에 불을 붙였더라도 그 속에는 공감 능력을 잃고 내 몫의 자유만을 말하는 이기심이 숨어 있다. 톨스토이는 베토벤을 빌려와 가부장 사회의 추함을 통렬하게 고발한 것이다.
다시 한 세대가 지난 1923년, 체코의 작곡가 야나체크는 그 불행한 여인을 떠올린다. 현악 사중주 형식을 빌려 그녀의 절망한 마음에 목소리를 빌려준다. 짧은 낭만적 선율, 민속적 리듬 사이로 긁히는 소리가 난다. 들어라, 그것은 애도다. 차마 꺼내 놓지 못한 아우성, 공감받지 못한 이의 영영 아물지 않는 상처의 목소리다.
나성인 음악평론가·풍월당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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