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빈의 수장고 안팎 훑기] “작품에는 영혼이 있다, 복제해 나눈 사람들 하나로 연결”
요제프 보이스의 멀티플 ‘유황상자’

2차 대전 생환 후 예술 역할 고심
사람 머리 뜻하는 150개 빈 상자
“예술가는 세상 바꾸는 무당” 신념
죽은 토끼에 그림 설명 파격도
대입 제도 비판했다 교수직 해고
식목 행위예술 문화재로 남아
사람 머리 뜻하는 150개 빈 상자
“예술가는 세상 바꾸는 무당” 신념
죽은 토끼에 그림 설명 파격도
대입 제도 비판했다 교수직 해고
식목 행위예술 문화재로 남아
사진·판화 복제품이 멀티플
![요제프 보이스의 ‘유황상자’, 197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아연으로 만들어진 두 개의 상자 중 왼쪽은 유황으로 코팅돼 있다. 빈 상자는 인간의 머리를 의미한다. 전도성이 높은 아연, 가연성이 강한 유황은 인간의 정신 활동을 상징한다. 총 150개의 멀티플 중 하나로, 독일의 피나코텍 미술관, 미국 하버드 미술관 등에 동일한 작품이 소장돼 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https://www.koreadaily.com/data/photo/2025/03/14/46525313-5ed6-462f-a657-723607027613.jpg)
예술작품을 통해 정신적 가치를 소통하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이상주의자, 바로 요제프 보이스이다. 우리에게는 백남준의 절친한 동료로도 잘 알려진 보이스는 전후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꼽힌다.
1921년생인 요제프 보이스는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에 스무 살의 나이로 독일 공군에 자원입대했다. 1944년에는 그가 탄 폭격기가 크림 반도에서 러시아군에 격추되었다. 훗날 그는 당시 눈 속에 파묻혀 있던 자신을 그 지역 유목민들이 발견, 동물의 비계와 펠트 담요로 치료해 주었다는 일화를 만들어 예술적 페르소나의 근거로 삼는다. 실제 기록상으로는 독일군 수색대에 의해 구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전쟁 중에 크고 작은 부상을 여러 번 입고 포로 수용소에 잡혀 있다가 종전을 맞았다.
전쟁이 끝난 후 보이스는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에 입학해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쟁의 후유증이 뒤늦게 몰려왔다. 그는 서른 초반에 2년 가까이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다. 상한 몸과 전쟁의 트라우마, 예술가로서의 역할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세상 만물이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한다는 강렬한 자각 속에서 어떤 영적인 계시를 받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영혼과 신비주의, 그리고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보이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예술가는 물질계와 정신계를 연결하는 중재자, 생명을 치유하고 세계에 변화를 이끌어내는 존재, 즉 무당이었다. 그는 무당으로서의 예술가라는 강렬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페르소나를 구축했다. 펠트로 된 모자, 조끼, 지팡이가 그의 기본 착장이었다. 독특한 외모와 강한 카리스마 때문에 어딜 가든 존재감이 엄청났다. 전쟁 중에 유목민에게 구조되어 치료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이런 캐릭터 구축을 위해 고안된 일종의 신화였다.
![1965년 퍼포먼스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https://www.koreadaily.com/data/photo/2025/03/14/a9a3aeb8-17ad-41ae-bdb0-2e21b46fba41.jpg)
교육도, 정치도 예술
![‘우리는 혁명이다’, 197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전신 크기의 판화 작품으로 180개의 멀티플 중 하나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https://www.koreadaily.com/data/photo/2025/03/14/fa89b377-6d63-45c7-909b-a0617c239946.jpg)
그의 수업은 주로 일상과 정치, 혹은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토론으로 구성되었다. 기존의 교과 과정은 무시했다. 창작 행위는 철저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학생 각자의 특성에 맞춰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육은 모든 사람의 보편적 권리라고 선언하면서 대학의 선발 입학제도를 비판했다. 그는 입학시험에 떨어진 학생까지 자신의 수업에 받아들임으로써 대학 측과 강하게 부딪쳤다. 이 문제는 열띤 논쟁으로 이어져 마침내 학생들과 함께 대학 행정실을 점거, 결국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으로 종결되었다. 이때 그가 웃으면서 끌려가는 사진이 ‘민주주의는 즐겁다’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남아 있다. 결국 이 사건으로 그는 대학에서 해임되었다.
![‘민주주의는 즐겁다’, 1973. 시위 후 연행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판화로 만든 후 ‘민주주의는 즐겁다’는 문구를 쓴 80개의 멀티플 중 하나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https://www.koreadaily.com/data/photo/2025/03/14/b12014f4-078f-4cbc-86e8-5788a85c4882.jpg)
1982년에는 독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현대미술 행사인 카셀 도큐멘타에 참가하면서 떡갈나무 7000그루를 심는 프로젝트를 작품으로 내놓았다. 시작 전에는 수많은 반대와 회의론에 부딪혔지만 자신의 사비를 투입하여 실행을 관철시켰다. 첫 번째 나무는 시내 한복판, 가장 까다로운 장소에 손수 심었다. 이런 곳이야말로 사람들이 나무를 가장 필요로 하는 장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셀시 행정 당국과 시민의 참여로 이루어진 이 프로젝트는 완성에만 5년이 걸렸다. 정작 작가는 그 끝을 보지 못하고 1986년 세상을 떠났지만, 덕분에 카셀은 현재 도시 곳곳에 떡갈나무가 가득하다. 카셀시는 2012년에 도시를 변화시킨 공로를 기려 ‘요제프 보이스 길’을 만들었고, 예술 작품이 된 떡갈나무들은 현재 문화재 보호법하에 관리되고 있다.
세상에는 ‘미키 17’의 낙관주의도 필요
유일무이하고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는 예술가. 보이스는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예술을 위한 예술’을 거부했다. 그는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고, 어떤 물건이나 행위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멀티플들은 그에게는 예술의 민주주의를 실현시킬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미키 17’ 얘기로 다시 돌아가면, 사회와 정치를 풍자한 이 블랙코미디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로는 흔치 않은 희망적 결말을 보여준다. 그런데 해피엔딩과 낙관주의는 종종 나이브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비관적인 회의론자가 대체로 더 매력적인 법이다. 복잡한 세상, 부조리한 삶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의심과 절망의 능력이 더 단련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무턱대고 낙관적인 이상주의자도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요제프 보이스는 바로 그런 예술가였다. 생전에는 괴짜에 순진한 이상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는 언제나 더없이 진지했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작품 속으로 직접 뛰어들었다. 저게 무슨 예술이냐는 말을 들었을 법한 형태의 작품들을 만들었지만, 작품과 작가가 구분되지 않는 그의 독창적인 삶은 그 자체로 전무후무한 예술이 되었다.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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