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호의 시선] 헌재가 권위를 살릴 길은
복수의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8인 재판관들의 평의가 열리고 있던 헌법재판소 회의실에서 돌연 고성이 터져 나왔다. 평의가 끝난 뒤 회의실을 나온 문형배 헌재 소장 대행은 “판결 준비하세요”라고 직원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순간 헌재엔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일이 4일로 정해졌다”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판결 준비하라는 것은 조만간 선고를 한다는 뜻인데, 헌재 선고는 대개 금요일(4일)에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생사 가를 사법 최고봉
잇따른 무리수로 국민 불신 자초
뼈 깎는 개혁만이 신뢰회복의 길
이날 헌법재판관 한명이 자신을 경호해온 경호원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10일 저녁을 하기로 약속을 잡은 사실이 알려진 것도 ‘4일 선고’를 뒷받침했다. 다음 주 금요일(11일) 선고한다면 전날 저녁 약속을 잡을 헌법재판관은 없기 때문이다. ‘4일 선고’ 소식은 이날 저녁 정·관·재계에 빛의 속도로 퍼져나갔다. 다음날인 1일 오전. 헌재 재판관들은 평의를 열었는데 약 30분 만에 끝났다고 한다. 이후 불려들어간 헌재 직원 앞에서 문 대행은 “4일 오전 11시 선고합니다. 됐죠”라고 헌법재판관들에게 말하고, 직원에게 이 사실을 공표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날 평의가 이례적으로 짧게 끝난 건 전날 평의에서 가닥이 잡힌 ‘4일 선고’를 최종 확정하려는 목적에서 열린 약식 회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소식통은 “문 대행이 다른 재판관들 듣는 앞에서 ‘됐죠’라는 말을 한 건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선고일을 지정하라’는 일부 재판관들의 요구를 문 대행이 받아들인 정황을 시사한 것 아니냐는 풀이가 나왔다”고 했다. 지금 대한민국 최고의 ‘핫플’은 서울 재동에 위치한 헌법재판소다. 이곳의 8명 재판관이 4일 내릴 윤 대통령 심판 선고는 이 나라 모든 국민이 받아들여야 하는 ‘국가이성’(raison d’Etat)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 심판 개시 이래 100여일간 헌재가 보여준 숱한 부주의와 무리수, 헛발질은 이 기관이 국가적 사안을 감당할 능력이 있느냐는 의구심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헌재는 윤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주 2회 변론기일을 지정하고 초시계까지 재면서 속도를 냈다. 윤 대통령 측의 ‘3분만 더 발언할 기회를 달라’는 청마저 뿌리쳤다. 11차례 변론으로 43일 만에 심리를 종결했지만 정작 선고는 그 뒤 38일이나 걸렸다. 56일간 17차례 변론을 한 뒤 11일 만에 선고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에 비해 심리는 치타, 선고는 거북이급 속도니 “이럴 바에야 변론 기회라도 충분히 줬어야 했던 것 아니냐”는 비난을 자초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더불어민주당 등 국회 탄핵소추단의 요구를 덥석 받아 탄핵소추 사유의 핵심인 내란죄를 빼준 것이다. 내란죄는 윤 대통령 ‘죄’의 80%를 차지한다는 것이 헌법학계 다수설이다. 성낙인 전 서울대 총장은 “이런 큰 덩치의 사유를 뺀 건 소추의 동일성 파괴란 점에서 헌재의 가장 큰 실책”이라고 했고,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각하 사유”라고 했다. 헌재는 단심제다. 게다가 대통령 탄핵심판은 국민이 뽑은 국가원수의 생사를 가르는 문제다. 유능한 판사는 유죄 가능성이 높은 피고인일수록 더 많은 발언 기회를 준다. 그래야 피고인이 판결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통령이 심판 대상이라면, 그 원칙은 더욱 확실하게 적용돼야 한다. 대통령 심판 결과는 대통령 본인은 물론 그를 뽑고 지지해온 국민들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절차적 정당성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헌재는 점수를 크게 잃었다.
헌재가 헌법 가치를 지키고, 국민 기본권 향상에 기여해온 공은 인정한다. 하지만 40년 가까이 외부 감시 없이 헌법상 독립기관의 지위를 누려온 탓에 운영이 방만해지고 모럴 해저드에 빠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헌재는 윤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문재인 정부 때의 검수완박 조치로 사용 못하게 된 지 오래인 검찰 조서를 증거로 채택해 논란을 빚었다. 검찰의 힘을 빼는 걸 지상과제로 여겨온 민주당이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을 제한하는 골자로 개정한 형사소송법을 야권 성향인 문형배 대행이 이끄는 헌재가 배척했으니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다. 법조계 일각에서 “문제의 형소법 조항이 5년 전에 개정된 사실조차 몰랐던 것 아니냐”는 냉소가 나오는 것을 헌재는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4일 윤 대통령 심판이 종결되고 탄핵정국이 마무리되면 개헌 논의가 급부상할 것이다. 헌재의 위상과 구조도 당연히 개헌의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다. 헌재가 새 헌법에서도 지금의 권위를 유지하고 싶다면 진정성 있는 자기 개혁이 절실하다.
강찬호(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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