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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더라도 승부를 복기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게 패자의 품격"

영화 '승부'에서 바둑황제 조훈현을 연기한 배우 이병헌.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조훈현, 이창호 간 사제 바둑 대결을 그린 영화 '승부'의 흥행세가 거침 없다.
영화는 지난달 26일 개봉 이후 줄곧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하며, 7일 135만 관객을 돌파했다. 현 추세로는 손익분기점(180만)을 넘어 200만 관객 돌파도 시간 문제로 보인다.

작품은 한국을 대표하는 두 천재 바둑기사 조훈현·이창호의 이야기를 그렸다. 조훈현(이병헌)이 제자 이창호(유아인)와 대결에서 패한 뒤 재기해 다시 한 번 정상에 도전하는 과정을 담았다.

유아인의 마약 파문 때문에 개봉이 연기되면서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로 직행할 뻔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두 주연의 호연과 밀도 높은 구성이 관객들 사이에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바둑을 몰라도 스토리를 따라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점도 흥행 요인으로 꼽힌다.
'보안관'(2017)에 이어 두번째 영화를 만든 김형주(45) 감독을 지난 3일 서울 청담동의 영화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영화 '승부'를 연출한 김형주 감독. ″바둑을 소재로 했지만, 바둑이 중요한 영화는 아니다″라고 했다.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Q : 그간 마음 고생이 심했겠다.
"말해 무엇 하겠나. 하지만 개봉 첫날 반응에 안도했다. 객석이 꽉 찬 무대 인사를 다니며 위안 받는 느낌이었다.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가 오랜만에 나왔다'는 평이 기억에 남는다."


Q : 왜 사제간 바둑 대결을 소재로 택했나.
"윤종빈 감독이 관심 있으면 찾아보라고 해서 스토리를 파보니 무협지처럼 재미있었다. 두 인물의 굴곡 심한 관계성에 매료됐다. 바둑이란 큰 장벽이 있었지만, 잡지 '월간 바둑' 30년치를 정독했다. 필력 좋은 관전기에서 대국장의 공기가 느껴졌다. 그 시절 바둑은 낭만이 있었고 프로기사들의 캐릭터성도 강했다. 두 사람의 관계성이 워낙 강렬하니까, 나처럼 바둑 모르는 사람도 경기 흐름, 유불리, 승부수 정도만 짚어줘도 충분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바둑 소재지만 바둑이 중요한 영화는 아니다."


Q : 조훈현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한국 기원을 통해 접촉했다. 영화 제의를 두세 번 거절했단 얘기를 듣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허락해주셨다. 바둑 부흥에 도움이 될 거라 판단하신 게 아닐까 싶다. '바둑돌 집는 것 만큼은 제대로 해라' '폭력적 장면이 없었으면 좋겠다' 두 가지를 당부하셨다. 시사회 날 조마조마했는데 재밌게 보신 듯 했다. '(영화에서처럼) 창호한테 가르친 게 없다. 알아서 잘한 거지' '재기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는데 영화에서 순식간에 지나가서 아쉽다' 정도의 말씀을 하셨다."

영화 '승부' 시사회에서 조훈현 국수(왼쪽)와 그를 연기한 배우 이병헌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Q : 두뇌 싸움을 스펙터클하게 펼쳐야 했는데 어디에 중점을 뒀나.
"두 개의 메인 대국을 차별화하고 싶었다. 첫번째 사제 대결에선 격렬한 감정 시퀀스를 밀도 있게 그리고 싶었다. 대국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각성하는 이창호, 당황하다가 패해 절망감에 빠지는 조훈현의 심리 말이다. 마지막 대국은 바닥을 치고 재기한 스승과 왕좌를 지키기 위한 제자가 맞붙는 클라이맥스인데,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두 배우에게도 승부를 즐기는 마음으로 대국에 임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스포츠 경기처럼 박진감 넘치게 그리려고 했다."


Q : 남기철 9단 역의 조우진 캐스팅이 절묘했다. 두 주인공에게 자극과 위로,조언을 전하는 존재다.
"회차가 많지 않아 특별출연이었지만, 임팩트는 상당했다. 당당한 고수의 느낌이 있어서 시나리오 쓸 때부터 떠올렸다. 남기철 9단 등 몇몇 기사들을 믹스해 창조한 캐릭터다. 서로에게 기댈 수 없는 스승과 제자가 감정적으로 의지할 누군가가 있었으면 했다. 비 오는 날 조훈현을 위로하는 신을 찍고 난 뒤 조우진이 '바둑을 연기로 치환해도 이 신의 모든 대사가 말이 되는데, 마치 내가 이병헌 선배에게 연기 어드바이스 하는 것 같아 불편했다'고 했다."

영화 '승부'에서 조훈현(이병헌, 왼쪽)이 어린 이창호(김강훈)와 바둑을 두는 장면.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Q : 실제와 가장 달랐던 부분은.
"어린 이창호의 성격이다. 어릴 때부터 돌부처 같았다고 들었지만, 영화에선 개구지고 안하무인 성격으로 그렸다. 철이 든 뒤 바둑을 대하는 태도와 대비를 주려고 했던 영화적 선택이었다. 이창호가 스승으로부터 훈육 받고, 프로기사들과 대국하면서 '내 바둑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 뒤 나름의 방어 기제를 만들면서 돌부처가 되지 않았을까란 해석을 했다."


Q : 유아인의 연기도 훌륭했다. 어떤 연기 디렉션을 줬나.
"촬영 초반 어떤 톤으로 이창호란 인물을 표현할 것인가 정도만 얘기했다. 실제 이창호처럼 과묵하게만 할 순 없으니까. 그리고 스승과 바둑 철학을 놓고 맞부딪힐 때, 자기 생각의 물러섬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유아인이 밀리지 않는 에너지로 연기해줬다. 두 배우의 연기가 워낙 좋아서 흘러넘치지만 않게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Q : 유아인 배우에 대한 원망은 좀 희석됐나.
"작품 내적으로는 고맙지만, 아직 원망스러운 부분도 있고 복잡한 심경이다. 미움은 시간 지나며 희석되지 않을까. 본인도 법적 처벌을 받았고,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것 같다."


Q : 이병헌 배우는 '창호 또 너냐, 도리 없지. 이것이 승부니까'를 명대사로 꼽았다.
"마찬가지다. 기자회견장부터 엔딩 크레딧까지 이어지는 에필로그 느낌의 시퀀스인데 가장 애착이 간다. 서로 괴롭고 처절한 승부를 펼쳐온 사제가 성장해서 각자 '무심(無心)'과 '성의(誠意)'의 마음으로 대국에 임하고 승부가 계속 될 것 같은 여운을 주고 싶었다. '월간 바둑' 관전기에 그 문구가 있었는데, 보자마자 이 대사로 영화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 '승부'에서 대국을 펼치고 있는 조훈현(이병헌, 오른쪽)과 이창호(유아인).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Q : 바둑 소재 영화를 만들며 배운 게 있다면.
"영화 외적으로 깨달은 게 많다. 인생은 늘 좋을 순 없다는 것. 사람처럼 영화도 팔자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둑을 공부하며 인상 깊었던 게 복기(이미 둔 바둑을 처음부터 다시 짚는 일)다. 승자와 패자가 경기 끝나고 마주 앉아 어느 부분이 모자랐는지, 어디서 승패가 갈렸는지 되새겨보는 과정을 갖는 스포츠는 바둑 밖에 없다. 상대를 존중하고 과정을 중시하는, 품격 있는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Q : '패자의 품격'을 보여주는 영화 같다.
"그렇게 봐주시면 좋겠다. 바둑이 인생에 자주 비유되는데, 우리는 매일 일상이라는 바둑판 앞에 앉는 게 아닌가 싶다. 바둑이 수천년 이어져 왔지만, 그동안 똑같은 바둑은 한 번도 없다고 한다. 경우의 수가 무한에 가깝다. 저마다 앉는 바둑판의 국면은 다르지만, 각자 생각하는 최선의 수를 찾고 자신만의 바둑을 두면 그걸로 되지 않나 생각한다. 지더라도 승부를 복기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게 바둑이자 인생 아닌가. 그런 점이 관객에게도 전달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현목([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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