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한국 정치의 씁쓸한 ‘경력 자살’, 우리 모두의 슬픈 컬래버
미국 정치의 추악함을 여과 없이 그려낸 영화 ‘미스 슬로운’에 나오는 말, ‘경력 자살(career suicide)’. 잘 나가던 여성 로비스트, 엘리자베스 슬로운이 스스로의 커리어를 망치는 길을 택하며 나온 말이다. 파면 엔딩의 윤석열 전 대통령 12·3 계엄 천하를 보며 이 말이 떠올랐다. 한국 정치의 계속되는 경력 자살은 모든 한국인이 콜라보한 결과인 슬픈 자화상이다. 강산이 두 번 바뀌기도 전에 대통령 한 명은 목숨을 끊었고 대통령 두 명은 탄핵됐다. 탄핵이 민주주의의 성취라고 도취해있을 때가 아니다. 탄핵이라는 일 자체를 겪지 않는 게 진정하게 성숙한 나라이니까.
대통령 한 명 때문이라고? 그 끝이야 논외로 해도 적법한 절차를 거쳐 대통령이 된 인물이다. 지난 1일 기자가 만난 철학자 최진석은 “정치가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당신이 바로 정치를 이렇게 만들었다”며 “스스로에게 답을 묻지 않기에 나라가 망하는 게 내 일이 아닌 것처럼 여기고 방관하는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뜨끔했다. 남 탓은 한가하다. 남의 나라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나라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건 극한 직업이다. 부끄러움은 늘 국민의 몫이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반탄’도, 응원봉을 든 ‘찬탄’도, 춥고 괴로운 겨울을 보냈다. 벚꽃 꽃망울과 함께 피어난 헌법재판소의 선고는 어느 한쪽의 성취가 아니다. 양쪽 모두에 대한 경종이다. 정치 양극단 모두가 자성의 시간을 맞이하지 않으면 10년 사이 또다른 비극이 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주어를 가리고 보면 양극단의 정치세력이 하는 말이 똑같다”는 최진석의 말 역시, 허투루 흘려버릴 게 아니다.
한국인이어서 괴롭지만 한국인임을 그만둘 생각이 없는 건, 찬탄 반탄이 매한가지다. 한국인이 한국을 포기할 순 없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어떻게 일궈냈는데, 여기에서 주저앉을 순 없다. 헌법은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할 것을 모든 국민의 의무로 적시하고 있다. 자율과 조화는 상대에 대한 악마화를 그만두고 입 아닌 귀를 열 때 가능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고 했다. 나부터도 교토와 파리 부동산 광고, 이제 그만 봐야겠다. 길을 잃은 건 어찌 보면 축복이다. 새로운 길을 찾을 시간이어서다. 한국 정치에서 더이상의 경력 자살은 보고 싶지 않다. 그 비극의 맥을 끊기 위해선, 시간이 많지 않다. 벚꽃은 빨리 진다.
전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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