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다시 전진하겠다는 독일
[특파원 시선] 다시 전진하겠다는 독일(베를린=연합뉴스) 김계연 특파원 = 독일인들은 스포츠 국가대항전이 열려도 국기를 좀처럼 흔들지 않는다. 작년 여름 독일에서 열린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24) 때도 마찬가지였다. 베를린 거리에는 2천500㎞ 넘게 떨어진 캅카스 산맥의 작은 나라 조지아 국기도 휘날렸지만 정작 주최국 독일의 검정·빨강·금색 국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국가사회주의를 내걸고 인류 최악의 흑역사를 쓴 나치의 악몽이 국기를 멀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는 2013년 총선 승리 행사에서 당직자가 국기를 무대에 올리자 빼앗아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이웃집에 국기를 내려달라고 항의하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여름동화'로 독일인들 기억에 남아있는 2006년 월드컵이 독일 국기의 반짝 전성기였다. 축구팬들이 들고나온 국기로 거리가 가득 찬 전례 없는 광경에 '드디어 콤플렉스에서 벗어났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도 오래가지 못했다. 급성장한 우익 극단주의 세력이 국기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전유하면서다. 네오나치 집회와 극우 독일대안당(AfD) 행사장에서는 국기 물결이 넘실댄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검정·빨강·금색은 우리 민주주의 역사의 색"이라며 "새로운 민족주의적 증오를 불러일으키려는 이들이 독차지하고 함부로 쓰게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국기를 둘러싼 문화전쟁은 곧 연방정부를 인수하는 기독민주당(CDU)의 참전으로 더 꼬였다. 작센안할트주 예리호버란트 지역의회에서는 최근 1년 내내 학교 건물 앞에 국기를 게양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을 CDU와 AfD가 함께 통과시켰다. 메르켈 총리 퇴진 이후 한층 오른쪽으로 기운 CDU는 재작년 '애국심 프로그램'이라며 국기를 더 많이 게양하고 국가도 자주 불러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의회에 상정한 바 있다.
내달 초 연방총리로 취임할 예정인 프리드리히 메르츠 CDU 대표는 국민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고 국제사회에서 독일의 존재감을 부각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독일, 다시 전진'을 구호로 내걸고 지난 2월 총선에서 승리한 뒤 "독일이 돌아왔다", "유럽은 독일에 기댈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총리로 취임도 하기 전에 국방비를 무제한 투입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는 데 성공했다. 유럽 국가들은 안보를 스스로 해결하라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압박 속에 최대 경제국 독일의 재무장 계획을 일단 환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성실한 조정자' 역할을 넘어 군대를 키울 테니 자국에 기대라는 독일 차기 지도자의 말을 주변국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작년 9월 폴란드에 수해가 났을 때다. 독일이 복구작업을 지원하기 위해 연방군 공병부대를 파견하자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가 시민들에게 말했다. "독일 군인을 보더라도 패닉에 빠지지 마세요. 도우러 온 것입니다. 혹시나 오해가 없도록 말씀드립니다."
장거리 미사일 타우러스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수 있다는 메르츠 대표의 발언에 러시아는 "다시 생각해봐 나치"(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라면서 독일의 약한 고리를 또 때렸다. 나치 독일에 대한 유럽의 본능적 공포는 유대 국가 이스라엘의 안보가 자국의 존재 이유라는 독일 정치인들의 쉼 없는 사죄만큼이나 오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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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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