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경의 아세안 워치] “R&D 경쟁력부터 높여라”…싱가포르의 새 무역질서 대응 전략

지난 16일 싱가포르 외교부 산하 외교 아카데미 강연에서의 로렌스 웡 싱가포르 총리의 발언이 화제다. 지난 2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해방의 날’ 관세 발표 이후, 자유무역 퇴조와 지정학적 위험이 커지고 있지만 강단 있는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어서다.
싱가포르, 관세 협상 매진 대신
경제 침체 대비한 정책 만들고
주변국 협력 통해 시너지 창출
경제 침체 대비한 정책 만들고
주변국 협력 통해 시너지 창출

이런 상황에서 시진핑 중국 주석이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캄보디아를 방문했다. 세 국가 모두 대미 무역 흑자국이면서 미국이 높은 관세를 부과했다. 시진핑은 이들 국가에 투자와 경제 협력 패키지를 제시했지만, 마냥 환영할 수만은 없다. 중국은 아세안 최대 무역 파트너지만, 수출과 투자 1위는 미국이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국내총생산(GDP) 30%가 대미 수출에서 나오는 미국 의존도가 가장 높은 국가다.
게다가 남중국해 문제는 여전히 갈등의 불씨로 남아 있다. 미국은 우회 수출 방지를 위해 중국 기업의 동남아산 태양광 패널에 3521%의 관세를 예고했다. 싱가포르 유소프이샥 연구소(ISEAS)의 레 홍 히엡 연구원은 시진핑의 베트남 방문을 “숨겨진 긴장 속에 연출된 외교 쇼(theatrical show)”라고 했다. 화려한 외교 의전 뒤에 감춰진 불편한 현실을 짚은 표현이다.
지역 협력 강화하는 싱가포르

싱가포르가 10% 보편 관세에도 긴장하는 건 개방 경제를 통해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무역과 물류·금융 중심지이자 첨단 제조업 허브인 싱가포르는 GDP 대비 수출 비중이 170%를 넘는다. 세계 최대 환적 항구 중 하나로 연간 3700만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대분)를 처리한다. 제조업이 GDP의 21%를 차지하고 반도체와 전자 부품이 주요 수출 품목이다. 따라서 싱가포르는 관세를 국가 전체의 경쟁력을 위협하는 요소로 간주한다.
웡 총리는 자유무역 시대가 끝나고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는 글로벌 경제의 ‘새로운 질서’가 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다른 아세안 국가가 관세 협상에 매달릴 때, 싱가포르는 차별화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관세 발표 직후 웡 총리는 ‘경제 회복력 태스크포스(SERT)’를 출범시켰다. SERT는 경제 기관과 비즈니스 연맹, 고용주 연맹, 노동조합 대표등 다양한 계층을 대표하는 이들로 구성돼 관세가 일자리와 임금, 자본시장, 국가 경쟁력에 미칠 영향에 대비한다. ‘무역 장벽이 한번 세워지면 낮추기 훨씬 더 어렵다’는 인식 하에 2025년 예산에 800달러 바우처와 저소득층 공과금 지원, 취약계층 현금 지원 확대 등을 포함해 경기 침체에 대비했다.
싱가포르의 전략은 국내 대응에만 그치지 않는다. 웡 총리는 지역 통합과 글로벌 파트너십 네트워크 강화를 강조했다. 이를 위해 추진하는 ‘싱가포르 플러스(SG+)’ 전략은 싱가포르를 동남아의 ‘컨트롤 타워’로 삼아 주변국과 시너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 전략의 핵심은 ‘트위닝(Twinning)’ 모델로 싱가포르의 기술력과 자본, 이웃 국가의 비용 경쟁력을 결합하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이렇게 R&D는 자국에서, 생산은 인건비가 싼 주변국에서 하는 방식으로 경쟁력을 키우며 더 넓은 시장을 바라보고 있다. 또한 한·중·일과 유럽연합(EU) 등 주요 경제권과의 협력을 강조하고, 중동·남미·아프리카를 ‘새로운 개척지’로 부르며 시장 다각화 의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오는 5월 총선을 앞둔 웡 총리에게 SERT 출범과 관세 대응은 리더십 시험대다. 주목할 점은 싱가포르가 국가 경쟁력 강화와 지역 협력이라는 장기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미·중 경제 전쟁에서 단기적인 관세 협상보다 세계 경제 체제의 근본 변화에 대응하는 국가 전략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 아세안 FTA 업그레이드 주력해야
싱가포르보다 더 높은 관세를 맞은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2.0%에 1.0%로 낮출 만큼 무역 환경이 악화한 상황이다. 한국도 미국과의 관세 협상과 함께 싱가포르식 장기 전략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SG+ 전략처럼 보호무역주의 시대에 국가 경쟁력의 핵심은 ‘장벽을 세우기보다 다리를 놓는’ 개방적 접근법과 지역 통합에 있다.
한국도 아세안과의 협력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다변화한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한편 역내 FTA 업그레이드에 주력해야 한다. 글로벌 경제 체제 격변 속에서 경제 체질 개선과 전략적 협력으로 새로운 무역 질서에 대응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아세안과의 경제 파트너십의 가치가 중요해졌다.
고영경 연세대 국제학대학원·디지털통상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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