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 닥친 밤, 부처님은 대웅보전 지켰다…천년고찰의 신비

지난 3월 최악의 산불로 경북의 강산은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특히 의성의 천년고찰 고운사는 전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부처님오신날이 코앞인데, 스님들 낙담이 얼마나 클까 싶어 고운사를 찾았다. 고운사 들르는 김에 화마에서 용케 살아난 안동의 명소들도 두루 돌아봤다. 의성에서 시작한 산불이 안동을 할퀴고 청송을 거쳐 영덕 해안까지 덮쳤다. 그 산불이 흉터처럼 남은 강산은 보기만 해도 아팠다.
이재민의 한숨만 자욱한 땅으로 무슨 여행을 가느냐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지금 경북은 무엇보다도 격려가 필요하다. 국밥 한 그릇만 사 먹고 돌아와도 그들에겐 힘이 된다. 여행은 때때로 누군가를 위로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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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산

고운사는 큰 절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안동 봉정사와 영주 부석사가 고운사 말사다. 고운사는 그 정도로 큰 절이다. 신라 신문왕 원년(681)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죽어서 신선이 되었다는 고운(孤雲) 최치원(857~?)과도 인연이 있어 이름이 ‘高雲寺’에서 지금의 ‘孤雲寺’로 바뀌었다.
고운사가 전소했다기에 잿더미만 널브러져 있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일주문이 예의 그대로 서 있었다. 잘 다듬어진 나무 기둥이 아니라 가늘고 비뚤어진 나무를 세워 전각을 받친 모습이 거룩하다. 등운산 고운사(騰雲山 孤雲寺). 우리 불교는 산사를 호명할 때 먼저 산을 부르고 절을 부른다. 의성 고운사가 아니다. 등운산 고운사다. 산사의 정체성은 산에 있다. 불이 그 산을 타고 넘어와 산사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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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포기한 보살

“3월 22일인가 시작했다는 불이 사흘 뒤 고운사를 덮쳤어요. 그날 오후 불이 산을 넘어오는 게 보였어요. 모두 대피하라고 명령이 내려왔어요. 불당의 불상들을 하나씩 옮기는데, 세상에 대웅보전 부처님은 안 움직이는 거예요. 장정 네댓 명이 붙었는데 꼼짝도 안 하시는 겁니다. 어쩔 수 없어 방염포로 급히 싸고 피신했어요. 스님들은 피했지만, 소방관 11명은 대피도 못 했습니다. 그 밤을 고운사에서 버텼는데, 옛날 스님들이 썼던 목욕탕에서 밤을 보냈답니다. 이튿날 불이 지나가고 돌아왔는데, 대웅보전이 말짱한 겁니다. 바로 뒷산이 새까맣게 탔는데도 기와 한 장 깨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고운사 명부전은 의미가 각별한 곳이다. 한국 불교에서 고운사는 ‘지장 성지’로 꼽히는 절집이어서다. 지장보살은 저승의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님이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성불(成佛)을 포기한 유일한 보살이다. 명부전은 기와 일부가 불바람에 날아갔는데도 타지 않았다.
화마 덮친 산사도 부처님오신날은 지내야 해서 대웅보전 아래 연등이 걸렸다. 정우스님에게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조심스레 물었다.
“이재민 돕기 모금 운동을 할 겁니다. 주지 등운스님의 특별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고운사 복원도 중요하지만, 이웃 주민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부처님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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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원림

선생이 살던 집은 무사했다. 집 바로 뒤편 빌뱅이언덕은 풀 나무 모두 불타 재만 남았는데, 쓰러져 가던 흙집만은 불을 피했다. 흙으로 쌓아 올린 집이어서 불을 이길 수 있었나 보다. 하루 만에 민둥산이 돼 버린 이 언덕에 유해가 된 선생이 잠들어 있다. ‘선생은 화장을 두 번 하셨네.’ 불길 견뎌낸 흙집이 대견해 실없는 농담 남기고 언덕에서 내려왔다.


주옥같은 문화유산이 안동에 워낙 많아서인지 만휴정은 기껏해야(!)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돼 있다. 대신 만휴정을 둘러싼 산과 계곡이 ‘만휴정 원림’이라는 이름으로 명승으로 지정됐다. 명승은 국가 지정 문화유산이다. 여기서 알아야 할 건 원림(苑林)이다. 원림(園林)이 집에 딸린 숲이면, 원림(苑林)은 제 숲처럼 빌려 쓴 집 밖의 숲을 이른다.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동양 정원의 특징이 이 원림에 담겨 있다.

만휴정은 산불조심기간이 끝나는 오는 15일까지 출입을 통제한다. 이후 개방 일정은 정해지지 않았다. 대신 만휴정 인근의 묵계서원은 5월 첫 주말부터 서원 체험 프로그램을 재개한다. 묵계서원도 문자 그대로 ‘기적적으로’ 화마로부터 살아남았다.

손민호([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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