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 넷이 들어도 꿈쩍않고…산불속 절 지킨 부처님

잿더미만 가득한 곳으로 무슨 여행이냐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지금 경북은 무엇보다도 격려가 필요하다. 국밥 한 그릇만 사 먹고 돌아와도 그들에겐 힘이 된다. 여행은 때때로 누군가를 위로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대웅보전 불상만 옮기지 못해 방염포

고운사가 전소했다기에 잿더미만 널브러져 있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일주문이 예의 그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등운산 고운사(騰雲山 孤雲寺). 우리 불교는 산사를 호명할 때 먼저 산을 부른다. 의성 고운사가 아니다. 등운산 고운사다.
일주문 지나 경내로 드니 화마로 깨친 범종 주변으로 온통 잿더미다. 폐허가 된 옛 가람들 뒤로 오색단청 화려한 가람 몇 채가 눈에 들어왔다. 고운사 부주지 정우스님이 불바람 불던 그 날 이야기를 들려줬다.

고운사는 이번 산불로 전각 30개 동 중 21개 동이 전소했다. 재로 변한 전각 중에 보물로 지정된 연수전과 가운루도 있다. 그러나 석가여래를 모신 대웅보전과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 산신령을 모신 산신각은 화마를 피했다. 세 가람 모두 신이 머무는 공간이다.

화마 덮친 산사도 부처님 오신 날은 기려야 해서 대웅보전 아래 연등이 걸렸다. 정우스님에게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조심스레 물었다.
“이재민 돕기 모금 운동을 할 겁니다. 주지 등운스님의 특별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고운사 복원도 중요하지만, 이웃 주민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부처님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묵계서원, 5월 첫 주말부터 체험 행사

선생이 살던 집은 무사했다. 집 바로 뒤편 빌뱅이언덕은 풀 나무 모두 불타 재만 남았는데, 쓰러져 가던 흙집만은 불을 피했다. 흙으로 쌓은 집이어서 불을 이길 수 있었나 보다. 하루 만에 민둥산이 돼 버린 이 언덕에 유해가 된 선생이 잠들어 있다. ‘선생은 화장을 두 번 하셨네.’ 불길 견뎌낸 흙집이 대견해 실없는 농담 남기고 언덕에서 내려왔다.

만휴정(晩休亭)은 조선 시대 문신 김계행(1431~1517)이 낙향한 뒤 말년을 보내려고 계곡에 지은 정자다. 깊은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폭포가 떨어지고 그 폭포 위 오른편 반석에 그림처럼 만휴정이 들어앉아 있다. 아는 사람만 찾아가는 비경이었는데, 2018년 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온 뒤 안동의 대표 명소로 거듭났다.
만휴정 올라가는 길은 막혀 있었다. 산사태 위험이 있어 접근을 통제했다고 한다. 만휴정은 안동 김씨 문중의 재산으로, 현재 ‘미래문화재단’이 위탁 관리 중이다. 미래문화재단 정주임 대표가 길을 열어줬다.

이 원림이 온통 잿빛이다. 새까맣게 타지 않았어도 불에 말라 잎이 누렇게 뜬 소나무가 천지다. 아무리 방염포를 씌웠다 해도 이 낡은 정자가 화마를 어떻게 견뎌냈는지 경이로울 뿐이다.
만휴정은 산불조심기간이 끝나는 오는 15일까지 출입을 통제한다. 이후 개방 일정은 정해지지 않았다. 대신 만휴정 인근의 묵계서원은 5월 첫 주말부터 서원 체험 프로그램을 재개한다. 묵계서원도 기적적으로 화마로부터 살아남았다.
손민호([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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