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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시선] 멕시코 '애니깽'과 5월 4일

[특파원 시선] 멕시코 '애니깽'과 5월 4일

(메리다=연합뉴스) 이재림 특파원 =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지만, 멕시코에 거주하는 한인 후손과 교민들에게 매년 5월 4일은 특별한 날이다.
정확히 120년 전인 1905년 인천 제물포항에서 영국 상선 일포드 호에 몸을 실은 1천31명(승선객 1천33명 중 사망자 3명과 출생자 1명을 빼고 더한 합계)이 지구 반대편 낯선 땅에 첫발을 디딘 때여서다.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와 궁핍의 나날 속에 선조들은 '묵서가'(墨西哥·멕시코를 뜻하는 한자어)를 기회의 나라로 여겼고, 나중에 과장과 거짓으로 점철돼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 근로자 모집 신문 광고에 기대감을 품은 채 과감하게 새 삶을 택했다.
이들이 배치된 유카탄주(州)의 에네켄 농장은 그러나 거의 '생지옥'에 가까웠다는 게 각종 기록물과 구술 속에 담겨 있다.
날카로운 잎을 가진 선인장 일종인 에네켄은 당시 수요가 많았던 선박용 로프의 재료였다.
한여름 40도에 육박하는 해안가 무더위 속에서 한인들은 이르면 오전 4시부터 일몰 때까지 에네켄 잎을 자르고 섬유질을 벗겨냈다.

황성신문은 1905년 7월 29일 자 사설에서 "조각난 떨어진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는다", "한국 여인들의 처량한 모습은 가축같이 보이는데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실정" 등과 같은 글로 당시 한인들의 처참한 일상을 전했다.
임금을 제대로 받지도 못한 멕시코 이주 한인 1세대는 소위 '애니깽'(에네켄)이라고 불리는데, 이 단어는 당시 한인들의 고초와 비탄 어린 삶의 축약처럼 인식된다.
1세대 멕시코 한인들은 힘든 상황에서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 지방회를 조직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해 숭무학교를 세웠으며, 고국에 독립자금을 송금하기도 했다.
현재 멕시코에는 이들의 후손 3만여명이 살고 있다. 세대를 거듭하며 외모나 언어는 현지화했으나, 한인후손회를 조직해 뿌리를 기억하려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많은 한인 후손이 사는 유카탄주 메리다와 캄페체주 캄페체, 그리고 유카탄주가 지난 2019년에 지방정부 차원에서 5월 4일을 '한국의 날'로 지정한 데 이어 2021년엔 멕시코 연방 정부가 매년 5월 4일을 '한국 이민자의 날'로 지정했다.

멕시코 메리다에 있는 한인이민박물관(주소 Calle 65 num. 397-A por calle 44 y 46, Merida, Yucatan)에는 초창기 이민자들의 사진과 함께 멕시코 한인 후손에게 주는 '5월 4일'의 의미를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외부에서 언뜻 보면 박물관인지 알기 힘든 이 '특별한 장소' 안에는 이민 초창기를 보여주는 흑백 사진을 비롯해 신분증, 편지, 각종 서류 등이 소중하게 보관·전시돼 있다. 이민사 관련 강연회와 특강도 종종 열린다.
최근 이곳에서 만난 '한인 이민 3세대' 돌로레스 가르시아(64·한국 이름 김민서) 박물관장은 "한인과 멕시코 현지인을 포함해 매년 2천명 정도가 방문하고 있다"며 "설과 추석, 삼일절 같은 날에는 한국 음식을 함께 만들거나 아리랑을 부르며 과거의 기억을 미래 세대에게 이어 가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직책은 '박물관 수장'이지만 가르시아 관장은 사실상 봉사자에 가깝게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다. 사실상 홀로 박물관을 지키며 전시물 관리, 건물 청소, 방문객 맞이 등을 도맡고 있다.
"한글 공부도 틈틈이 하고 있다"면서 미소와 함께 책상 서랍에서 글씨 연습용 수첩을 꺼내 보여주기도 한 가르시아 관장은 "더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 주길 하는 바람이 있다"면서 "자원 부족으로 당국에서 요구하는 박물관 운영 표준에 맞추기가 어렵지만,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이곳을 지켜갈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email protected]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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