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일에 월정사 석탑 만나볼까…대한항공 조중훈 공덕비 있는 까닭

“고려시대 다각다층석탑의 전형을 보여주는 석탑이죠. 탑에 군데군데 그을린 자국이 보일 건데, 6·25 때 월정사 전체가 국군에 의해 불살라지면서 함께 훼손된 흔적입니다. 전후에도 계속 복구를 못하다가 1970년에야 전면 보수했죠. 이번 보수 공사는 50년 만에 최대 규모입니다.”
전날 언론 공개 때 안내를 맡은 월정사 성보박물관 홍순욱 학예실장의 설명이다. 당시 공사를 이끈 이가 한국 미술·석조문화재의 대부로 불리는 호불(豪佛) 정영호(1934~2017) 전 단국대 석좌교수다.

643년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한 월정사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각각 큰불을 겪고 중건됐다. 다시 잿더미가 된 건 1·4 후퇴로 전선이 밀릴 무렵인 1951년 정초. 사찰이 행여나 북한군의 은신처가 될까 우려한 국군 측은 월정사와 그 말사(末寺)인 상원사를 불태우기로 했다. 월정사는 17동 건물이 몽땅 타버렸지만 상원사는 법당에 지키고 앉은 주지 스님 때문에 결국 문짝만 뜯어 태우고 퇴각했다. 덕분에 국보인 상원사 동종도 지금껏 살아남았다.
이렇게 타버린 월정사를 복구하는 게 하세월이었다. 월정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1958년 조사당을 중건하고 69년과 71년 각각 적광전과 관음암을 중건한다. 이때 월정사에 크게 시주한 이가 대한항공 한진그룹 창업주인 고 조중훈(1920~2002) 회장이다. 이 경위에 관해선 전하는 말이 조금씩 다른데, 현장에서 들은 두가지 버전은 다음과 같다.
“당시 오대산 목재를 베어 절을 중건하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재원이 여의치않아 공사 현장을 천막으로 덮어두고만 있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조중훈 회장의 부친(조명희) 꿈에 월정사가 나와서, 사람을 시켜 가보라 했답니다. 조 회장이 사정을 듣고 큰 돈을 시주한 덕에 대웅전(월정사에선 적광전)과 동서 양당 건물을 다시 지을 수 있었죠.”(정념 주지스님)
“당시 월정사에 탄허(1913~1983) 스님이 계실 땐데, 전각을 다시 세우려고 서울에 승려를 탁발하라 보냈답니다. 탁발하며 이집 저집 다니는데, 그 중 한곳이 조중훈 회장 댁이었던 거예요. 마침 전날 부친 꿈에 월정사가 나왔던지라 조 회장이 예사롭지 않게 듣고 큰돈을 시주하셨죠. 그 후로 대한항공도 인수하고 사업이 아주 번창했답니다.”(홍순욱 학예실장)

불심이 깊었던 조 회장은 이후에도 월정사를 두루 챙겼다고 한다. 때문에 조 회장 사후 49재도 월정사에 크게 열렸다. 아들인 조양호(1949~2019) 회장 사후에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이 빈소를 찾고 생전 업적과 염원을 기리는 ‘100재’(불교의식)를 지낸 것도 이 같은 인연 때문이다.
1970년 팔각구층석탑 보수는 화재 등 영향으로 표면이 떨어져나간 데다 오랜 세월 탑신이 기울어진 걸 보강하려는 차원이었다. 공사 중에 5층 옥개석(지붕돌)에서 은제도금여래입상(높이 9.7㎝)이 나왔고 1층 탑신에선 사리장엄구까지 발견됐다. 총 9종 12점의 일괄유물은 10∼11세기경에 제작된 것들로 탑이 건립될 때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2003년 보물로 지정됐다.
이번 보수공사는 이후 반세기 동안 취약해진 석탑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엔 바깥에 드러난 금속장엄물이 노후화해 시작했지만 탑의 7층 이상 옥개석(지붕돌)과 상륜부를 해체해보니 일부 석부재들도 갈아끼워야 했다. 홍 실장은 “찰주(불탑 꼭대기의 장식 중심이 되는 기둥)도 신재료로 갈아 끼웠고, 70년에 만들었던 금속 풍탁(일종의 풍경)도 새로 제작해서 달았다”고 설명했다. 회수한 원부재 가운데 찰주(1개), 보주(1개), 용차(1개), 선단부(1개), 간주쇠(4개), 보개(1세트), 수연(1세트) 등은 보존처리를 거쳐 성보박물관에 보관했고 하반기부터 전시 예정이다.


강혜란([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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