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지나가는데, 목덜미 꽉 잡은 느낌…'연두 바다' 펼쳐진 이곳
진우석의 Wild Korea 〈25〉가평 연인산 야생화 트레킹
연인산은 압도적이다. 웅장한 산세, 다양한 식생, 크고 작은 계곡 등 자원이 국립공원 부럽지 않다. 해서 해마다 봄이면 장대한 연두의 바다가 펼쳐지는 연인산(1068m)에 간다. 봄볕 잘 드는 산비탈에서 얼레지·피나물·홀아비바람꽃 등 알록달록 어여쁜 야생화들과 바람난다. 연인산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다정한 연인이 되어 준다.
연인산은 가평군에 의해 새롭게 태어났다. 1990년대 가평군에서 알려지지 않은 봉우리에 ‘연인산’이란 세련된 이름을 붙였다. 이름을 바꾼 이후 찾는 사람이 많아지며 한국 100대 명산에 선정됐다.
이른 아침 조종면 마일리 국수당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국수당은 국가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올리던 성황당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연인산을 찾는 사람은 대개 교통 편하고 주차장을 잘 갖춘 북면 백둔리 쪽을 들머리로 한다. 하지만 야생화를 제대로 보려면, 마일리를 들머리로 우정능선을 밟아야 한다.
마일리 국수당에서 우정고개까지는 제법 가파른 길이 1시간쯤 이어진다. 개복숭아꽃·귀룽나무·야광나무·붉은병꽃나무 등 화려한 꽃들을 구경하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다. 우정고개에서 길이 갈린다. 오른쪽 능선은 칼봉, 내려가는 임도는 용추계곡 가는 길이다. 우정봉은 왼쪽 길을 따른다. 여기서부터 정상까지가 우정능선이다.
능선에 올라서면 발이 호강한다. 발바닥으로 흙길의 폭신한 촉감이 전해온다. 길섶에서 하나둘 꽃이 보이기 시작한다. 개별꽃과 붓꽃들이 손을 흔들며 환영한다. 다가가 톡톡 꽃 머리를 매만지며 화답해 준다. 홀아비꽃대가 꼿꼿하게 줄기를 세우고 눈처럼 흰 꽃을 보여준다. 저쪽에서는 샛노란 피나물이 손짓한다.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꽃들이 저마다 봐달라고 아우성이다.
꽃구경의 절정은 우정봉 직전의 능선이다. 홀아비바람꽃이 보인다면, 능선 아래쪽 산사면을 찬찬히 살펴보자. 능선에서 몇 발짝 내려서자 얼레지·피나물·현호색 등이 지천으로 깔렸다. 움직이면 꽃을 밟을 수밖에 없어 걷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구름에 들어갔던 해님이 나오자 꽃들이 별처럼 반짝인다.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온 커피를 꺼내 마시며 꽃들과 밀회를 즐긴다.
우정봉 직전 큰 바위 위에서 조망이 열리는데, 화들짝 놀랄만한 풍경이 펼쳐진다. 우정능선의 오른쪽 산사면이 온통 연둣빛이다. 세상의 모든 연두를 모아 놓은 듯하다. 연두 속에서 군데군데 핀 산벚꽃이 봄의 절정에 화룡점정을 찍는다. 연두는 다정하고 개방적이다. 연두 안에는 농담과 밀도가 다른 다양한 연둣빛이 존재한다. 반면 초록은 조금은 획일적이다. 짧은 연두의 시간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우리에게도 찬란한 연둣빛 시절이 있었다. 마치 첫사랑 같은 그런 시절이.
우정봉에서 정상 가는 길은 노란 비단을 펼쳐놓은 듯하다. 노랑제비꽃과 양지꽃이 땅을 수놓았다. 대망의 연인산 정상. 조망이 시원하게 열린다. 북쪽으로 명지산과 화악산으로 흘러가는 산줄기가 장관이다. 정상석 앞의 ‘사랑과 소망이 이뤄지는 곳’이란 글씨가 정겹다. 정상 남쪽 산사면의 철쭉 군락지는 아직 겨울옷을 입고 있다. 5월 중순이 지나야 철쭉이 필 것 같다.
하산은 정상에서 직접 이어진 능선을 따라 내려와도 되지만, 왔던 길을 조금 내려가 ‘연인능선’ 이정표를 따라가는 게 좋다. 그 길로 150m쯤 내려서면, 거대란 물푸레나무 아래 벤치가 놓인 그림 같은 풍경을 만난다. 여기가 숲정이 쉼터로 옛날 화전민이 살았던 곳이다. 쉼터 왼쪽으로 연인샘이 있다. 샘에서는 끊이지 않는 연인의 정처럼 물이 퐁퐁 솟는다.
쉼터 오른쪽에는 무인산장인 연인산장이 있다. 1990년대에 열렸던 연인산 철쭉제에 사용했던 건물을 연인산장으로 바꿔 비상시 탐방객이 이용하게 할 수 있게 열어두었다. 산장에서 우연히 고영(62)씨를 만났다. 그가 연인산장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주인공이다. 춘천의 산악인으로 과거 연인산을 찾아왔다가 산장이 지저분한 것이 마음에 걸려 청소를 시작했다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무려 10여 년을 관리해 오고 있다. 덕분에 산장은 낡았지만 제법 깨끗하다. 명지산(1252m) 가는 길에 잠시 들렀다가 하룻밤 자기로 한 산꾼 한 분이 합세해 고영씨와 더불어 수다를 떨었다. 처음 본 산꾼들과 이야기꽃을 피운 게 얼마 만인지.
연인산장에서 조금 내려가자 박새 군락지가 나온다. 박새와 어우러진 숲은 원시적 느낌을 물씬 풍긴다. 연인샘에서 내려온 물은 용추계곡으로 흘러간다. 계곡길이 끝나면 푹신푹신한 잣나무숲이 이어진다. 이어 전패고개 갈림길을 만난다. 전패고개에는 궁예가 왕건에게 패전 후에 잠시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왼쪽 임도가 용추계곡 가는 길이고, 마일리는 오른쪽 길을 따르면 된다.
임도로 들어서자 휘파람이 절로 난다. 길은 순하다. 이렇게 구렁이 담 넘듯 부드럽게 우정고개까지 이어진다. 우정고개에서 한숨 돌리고, 조심조심 거친 길을 내려온다. 올라오면서 미리 봐둔 계곡에서 등산화 끈을 풀었다. 맨발을 물에 담그며 찬란했던 봄 트레킹을 마무리한다. 지나는 봄의 목덜미를 꽉 잡은 느낌이다.
연인산 야생화 트레킹은 마일리~우정고개~정상~연인산장~우정고개~마일리 원점회귀 코스가 좋다. 왕복 12㎞ 거리. 5시간 30분쯤 걸린다. 종주꾼이라면 마일리~연인산~아재비고개~명지산~익근리 코스가 좋다. 19㎞로, 9시간쯤 걸린다. 연인산장에서 1박 하는 걸 추천한다. 가평 현리 버스정류장에서 마일리 가는 버스가 하루 4차례 오간다. 현리의 맛집으로 ‘농부의 밥상’이 소고기전골, ‘형제정식한상’은 생선구이 백반을 잘한다.
진우석 여행작가 [email protected]
시인이 되다만 여행작가. 학창시절 지리산 종주하고 산에 빠졌다. 등산잡지 기자를 거쳐 여행작가로 25년쯤 살며 지구 반 바퀴쯤(2만㎞)을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캠프 사이트에서 자는 게 꿈이다. 『대한민국 트레킹 가이드』 『해외 트레킹 바이블』 등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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