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서울 사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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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 석가탄생도를 따라 떠나다
석가탄신일을 맞아 최근 오랜만에 한국에 나들이 온 조선 전기 불화로 추정되는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를 자세히 만나며 불교를 접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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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찰 여행은 서울로 떠난다. 불화와 불상 보는 법으로 사찰 여행에 흥미를 더하다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서울 사찰 여행》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가장 박대받던 조선 시대에 성리학과의 싸움에서 아슬아슬하게 명맥을 이어온 서울의 사찰을 찾아, 조선 불교의 현실과 생명력을 풀어냄과 동시에 불화와 불상 보는 법 및 불교 세계관에 대한 해설을 상세히 담아 사찰 여행의 흥미를 더해주는 책이다.
일반인이 박물관이나 사찰에서 불교 문화를 깊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불교 용어에 친숙하고, 평소 불교 예술 감상을 즐기는 이라도 언제나 아쉬운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황윤 작가의 격이 다른 쉬운 설명은 의미있게 다가온다. 숫자의 나라 인도에서 온 불교의 끝이 없을 듯한 시공간과 그 속에 여러 부처님들을 명료하게 이해시켜 준다. 누구인지, 왜 거기 계시는지, 왜 함께 있는지 등등. 불상과 불화를 보는 안목을 길러주며, 드디어 알게 되었다는 경지를 선사한다.
서울 사찰 여행은 사라진 사찰 원각사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흥천사, 봉은사, 승가사, 옥천암 마애불좌상, 호국지장사, 달마사, 조계사로 이어진다. 여기에 조선 전기 불교미술의 대표작인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 감상과 ‘팔상도’ 소개가 더해지면서 불화와 불상 보는 법을 정리해준다. 작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를 《월인석보》 ‘팔상도’와 비교 분석하고, 궁궐 디자인, 의복 양식 등을 근거로 조선 전기 작품임을 밝혀내는 과정은 고고학적인 흥미를 끌어내기에 충분하다. 이뿐 아니라 조선 시대의 진신사리의 행방과 종각에 있는 종이 어느 사찰에 있었던 것인지 거슬러 추적하는 스토리를 통해 조선 불교의 역사를 읽어내며, 숭유억불 정책 속에서도 살아남은 불교의 힘을 전한다.
이 책은 단편적인 서울 사찰 여행을 뛰어넘어 조선 시대의 불교, 더 나아가 불교 세계관을 깊게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 서울 사찰 소개서와 차별된다. 특히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의 추천으로 그 깊이와 신뢰를 인정받았다.
황윤 작가는 〈일상이고고학〉 시리즈를 꾸준히 펴내면서 불교 이야기를 전하는 다양한 접근을 시도해왔다. 경주 여행과 백제 여행에서는 ‘탑’을, 국립중앙박물관 여행에서는 ‘반가사유상’을 통해 불교 이야기를 펼친 바 있다. 이번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서울 사찰 여행》에서는 ‘불화와 불상 보는 법’으로 불교 이해를 위한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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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도’로 만나는 석가모니의 일대기. 일본과 독일이 소장한 진귀한 조선 전기 미술 ‘석가탄생도’ ‘석가출가도’
책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다룬 ‘팔상도’가 소개되어 불교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팔상도’는 여러 버전이 있지만 그중에서 조선 전기 미술을 대표하는 두 점 ‘석가탄생도’(후쿠오카 혼가쿠지 소장)와 ‘석가출가도’(쾰른동아시아미술관 소장)를 상세히 살핀다. 15세기에 그려진 걸작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한 점도 남아있지 않고 일본과 독일이 각각 한 점씩 소장하고 있어 안타까움이 큰 작품이기도 하다. 최근 국내에서 나란히 전시되어 그 아름다움과 존재감을 확인한 바 있다.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는 여타 ‘팔상도’와 마찬가지로 여러 에피소드를 한 작품에 그려낸 형식이다.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석가탄생도’의 구성은 석가모니 탄생 → 천상천하 유아독존 → 9마리의 용에 의해 씻고 있는 석가모니 → 나무 아래 휴식을 취하는 마야부인과 보모가 안고 있는 석가모니 장면으로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책에는 각 장면을 확대하여 디테일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화보를 배치하여 통으로 감상했을 때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표정 및 이야기까지 상세히 들여다 볼 수 있어 감동을 배가시킨다.
저자는 이 두 점 외에도 이건희 회장이 기증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팔상도(18세기)’를 소개함으로써 8장 전체를 통해 석가모니의 일대기에 실린 하나하나의 장면까지 읽어낼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 중에서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여러 유혹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깨달음에 이르는 장면을 묘사한 6번째 그림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에는 익히 알고 있는 석가모니의 항마촉지인 포즈가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깨달음 직후 포교하는 모습을 담은 7번째 그림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에는 석가모니 양 옆에 위치한 문수보살(최고의 지혜를 상징)과 보현보살(실천 상징)이 나오는데, 이는 지금도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에 가면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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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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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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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
저자는 흥천사 대방을 쭉 돌면서 걸려있는 편액에 주목한다. 총 5개이 현판 중 서선실, 옥정루 그리고 대방 전면에 보이는 흥천사 현판 중 왼쪽 작품이 흥선대원군의 글씨다(125쪽). 흥선대원군은 추사 김정희와 5촌 지간으로 자신보다 34살이나 많은 김정희로부터 서예, 난초 치는 법 등을 배웠다. 그래서인지 흥선대원군의 서체가 김정희와 많이 닮아 있다. 김정희가 쓴 봉은사 판전의 현판(309쪽)과 비교하여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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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중종이 죽고 나서 즉위한 인종이 불과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문정왕후의 아들이 11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된다. 그토록 불교를 탄압했던 중종이었으나 부인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시기는 불교의 부흥기로 돌아선다. 이 시기에 봉은사 주지는 보우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요승 보우”라 기록되어 있는 그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도 봉은사에 가면 보우를 기념하는 보우당이라는 건물이 있을 정도로 보우는 존경받는 승려다. 유교 사상으로 무장한 유학자들의 눈으로 볼 때는 요승일지 모르나, 불교계에서는 침체된 불교를 중흥시킨 영웅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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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지장사
국립묘지 안에 있는 호국지장사는 창빈 안씨 묘의 원찰로, 호국불교를 상징하는 사찰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찰의 특이점은 노천 지장전으로 무려 2500여 기의 작은 지장보살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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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한편 조선총독부는 급격히 교세가 팽창한 보천교를 견제 압박하여 결국 교단 자체가 해체하기에 이른다. 이때 보천교가 백두산 원시림에서 구한 건축 자재를 사용하는 등 공들여 세운 본당 건물인 십일전은 단돈 500원에 일본인에게 경매 낙찰된다. 불교계는 십일전을 1만 2000원을 지불하고 재구입하여 각황사를 헐고 십일전을 옮겨와 새 본당을 지었다. 독립 후인 1954년 조계사로 명칭이 바뀌었고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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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유억불 정책 속 왕실의 불교 사랑
태조 이성계는 한양을 수도로 삼으면서 흥천사를 사대문 안에 지었다. 1396년 부인인 신덕왕후가 죽자 능을 조성하고 그 옆에 사찰을 만든 것이다. 태조에게는 명나라 영락제의 압박으로 303개에 이르는 사리를 넘겨준 일화가 있다. 사리 수집에 이토록 열성이었던 점으로 미루어볼 때, 신덕왕후에 대한 사랑을 넘어 불교에 심취했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 왕 중에서 불교를 추앙했던 대표적인 임금으로는 세종대왕을 꼽을 수 있다. 세종은 7개 종파를 선종과 교종 2개로 정리하고, 각 종파 당 18개씩 총 36개의 사찰만 국가 공인 사찰로 인정하는 등 충실한 유교 군주의 면모를 보인 국왕이다. 그러면서도 1448년 부인인 소헌왕후가 죽자 폐지되었던 궁궐 내 내불당을 다시 만드는가 하면,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에게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책으로 펴내도록 지시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사업을 펼쳤다. 이 때 수양대군이 세종에게 바친 《석보상절》은 한글로 쓴 최초의 산문 문헌으로, 세종은 《석보상절》을 읽고 감동하여 각 구절마다 직접 찬불가를 지어 총 580여 곡을 완성하였는데 이를 모아 편찬한 것이 바로 《월인천강지곡》이다. 월인천강이란 부처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수많은 세계에 등장하여 교화하는 모습은 마치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것과 같음을 뜻한다.
《석보상절》을 쓴 수양대군은 왕(세조)이 된 이후 《석보상절》과 세종대왕이 쓴 《월인천강지곡》을 합쳐, 수정한 후 《월인석보》을 출판하여 불교 사랑을 이어간 왕이다. 《석보상절》과 《월인석보》를 만들면서 석가모니 일대기를 8장면으로 압축한 그림을 판화로 제작하였는데, 이것이 ‘팔상도’이다. 정조도 아버지인 사도사제의 능 근처에 용주사를 세우는 등 불교를 이어간 면모를 보인 왕이다.
이 외에도 조선 불교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특징으로 왕실 여성의 참여와 후원을 빼놓을 수 없다. 비구니 사찰로 유명했던 정업원은 고위층 여성이 주지를 맡았으며, 후궁과 양반 출신 여성이 승려로 참여하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세를 떨치기도 했다. 이러한 양상은 급기야 유교 가치관으로 무장한 신료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조선 전기에 그려진 왕실 후원 불화 중 상당수는 도성 내 비구니 사찰의 불사와 함께 그려지곤 했기에 조선 시대 불교 예술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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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이 불교를 비판한 이유. 그럼에도 불교가 없어지지 않은 이유
조선은 유교 국가를 표방하면서도 왕실의 각별한 불교 사랑으로 그 명맥을 이어왔지만, 연산군과 중종 시기는 조선 시대 불교 탄압이 절정에 이르러 유생들의 방화로 흥천사와 흥덕사가 불타고 세조가 세운 원각사는 폐사에 이르는 등 불교는 크게 위축되었다. 제도 면에서도 도첩제와 승과가 폐지되었으며, 세종 이후부터 선종 교종 이렇게 두 개의 종파로 운영하던 불교 시스템마저 폐지된 시대로 기록되었다.
그렇다면 신라와 고려를 거쳐 대대로 이어온 불교를 성리학은 왜 그리 비판하고 공격했을까? 성리학은 본래 중국에서부터 불교를 비판하며 성장한 유교 이론이다. 따라서 성리학 근본주의에 빠지면 빠질수록 불교를 더욱 업신여기며 비판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불교는 왜 없어지지 않았을까? 유교 사상으로 무장한 조선 지배자들이 아무리 불교를 비판하더라도 성리학은 병들고 늙고 죽는 인생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주지 못하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이와 달리 생로병사의 원인과 해결책을 제안해주는 데다 죽은 이의 극락왕생까지 축원해주는 불교는 백성뿐 아니라 왕실에게도 마음의 위안처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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