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존재를 묻는 작품" 진은숙 18년만의 오페라 함부르크에서 초연

이와 같은 문구로 소개된 진은숙의 오페라 ‘달의 어두운 면(Die dunkle Seite des Mondes)’이 18일(현지시간) 독일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됐다. 양자 물리학의 천재과학자,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의사,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여성이 등장하는 이야기다. 진은숙은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첫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2007년 뮌헨에서 초연한 후 18년 만에 두 번째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다.
무대는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달, 그 사이를 향해 올라가는 계단들, 1930년대의 비인간적인 현실을 묘사한 차가운 배경으로 구성됐다. 또 무대 위에 설치된 카메라의 영상이 라이브로 상영되는 독특한 시도도 있었다. 진은숙의 음악에서 중요한 요소인 타악기 역시 강조됐다.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은 프로그램북에서 “이 작품에서 타악기는 두드리거나 문지르는 등의 방법으로 소리를 낼 수 있는 모든 것에 해당된다”고 소개했다. 타악기가 활에 긁히는 소리, 사포가 문질러지는 소리 같은 다양한 소리가 활용됐다. 진은숙 특유의 다양한 색채감이 두드러지는 음악이다.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의 위촉으로 작곡된 이 오페라를 위해 진은숙은 소재를 고르고, 독일어로 단편 소설 정도 분량의 이야기를 썼으며 대본도 집필했다.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1900~58)의 삶에서 영감을 얻었다. 여기에 파울리와 교류했던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의 존재도 등장한다. 파울리의 곁을 맴도는 여인도 실제 있었던 한 여성과의 만남에 기반한다. 하지만 진은숙은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키론, 아스타로스로 새로 만들고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쳤다.
특히 이 이야기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연상케 한다. 물리학자 키론은 존경받는 학자이지만 내면에서는 자신을 실패자라 느끼고, 인생에 대한 질문을 해결하지 못해 괴로워한다. 영혼을 치유하는 아스타로스는 키론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듯하지만 결국 키론의 정신을 지배하는 자로 묘사된다. 여기에서 주인공에게 폭탄 제조를 강요하는 동료 과학자들의 모습은 20세기 전쟁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진은숙은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과 사전 인터뷰에서 “이 오페라를 통해 ‘악’이란 무엇인지, 인간은 왜 이런 존재인지에 대한 질문을 탐구하고자 했다”고 했다.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와 연관될 수 있는 아스타로스를 통해 악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낸 이유다.
진은숙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요소인 ‘꿈’도 이번 오페라의 한 축이다. 주인공은 강렬한 꿈을 꾸는 인물이며 꿈속의 인물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꿈을 해석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아스타로스를 찾아가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결국 키론은 꿈을 빼앗기면서 삶의 영광과 영감을 모두 잃게 된다. 진은숙에게 ‘꿈’은 중심적인 주제다. 지난해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늘 강렬한 꿈을 꿨다. 꿈에서는 빛의 모든 걸 보는 듯했다”라고 했다. “현실에서 극도로 내성적이고 말도 없었던 나는 꿈에서 암시를 받고 대화를 할 수 있었다”는 그는 “내 인생은 내 꿈의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진은숙은 극장과 사전 인터뷰에서 한국의 상황 또한 언급했다. “오페라의 마지막 장면인 10번 장을 지난해 11월 쓰기 시작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권력을 잡고 한 달 후 한국의 대통령이 갑자기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에 나는 극도의 공포에 빠졌다.” 진은숙은 “나는 한국에서 24년간 군사 독재 체제에서 살았고 그 시절은 끔찍했다. 부정적인 기억이 되살아났다”며 “직접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그 감정의 일부가 대본에 반영됐다”고 했다. 오페라 작품의 배경은 1930년대 초반이다.
18일 초연된 ‘달의 어두운 면’은 함부르크에서 21ㆍ27ㆍ31일, 다음 달 5일 추가 공연된다. 진은숙과 20년 넘게 함께 작업해온 지휘자 켄트 나가노가 지휘를 맡았으며 바리톤 토마스 레만(키론), 보 스코프스(아스타로스), 시오반 스태그(미리엘)를 비롯해 한국의 카운터테너 김강민, 소프라노 손나래가 출연했고, 아일랜드의 극단인 데드 센터가 연출했다.
진은숙은 지난해 클래식 음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을 수상했으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등의 악단에서 작품을 위촉받았다. 2022년부터 통영국제음악제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김호정([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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