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겸재 정선의 그림에 보이는 ‘서울공화국’의 뿌리

‘장동팔경첩’에서 묘사한 장동
당시 돈 많은 권력자들의 부촌
도시인의 자연 동경 심리 투영
다산도 아들에 서울 거주 권유
당시 돈 많은 권력자들의 부촌
도시인의 자연 동경 심리 투영
다산도 아들에 서울 거주 권유
진경산수는 사회 변화 산물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본)에서 ‘청풍계’. [사진 호암미술관]](https://www.koreadaily.com/data/photo/2025/05/23/de553cb4-0b91-4a52-84fb-0aa9c9c77355.jpg)
기자가 특히 흥미롭게 보는 것은 당대의 사회적 배경이다. 일단 진경산수화 자체가 사회적 변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선의 시대인 18세기는 전란 이후 정치경제가 안정되어 우리 산천을 유람하는 문화가 크게 유행한 시기였다. 여행을 마친 이들이 기념을 위해, 또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 와유(臥遊·누워서 하는 유람)를 위해 화첩을 주문하면서 국보 ‘금강전도’ 같은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꽃필 여건이 만들어졌다.
또한 ‘인왕제색도’처럼 서울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 장동(壯洞), 지금의 서촌을 그린 그림들에서 머나먼 중국이 아닌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이상적 자연을 찾은 정선과 그의 후원자들의 낙관적 현실주의,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읽을 수 있다. 장동은 조선 후기 모두가 동경하던 부촌이었으며 수려한 자연 경관과 높은 부동산 가격을 자랑했다. 고관의 지위에 오른 안동 김씨는 장동에 살며 ‘장동 김씨’라 불렸다.

훗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청풍계 터 근처에 자택을 마련한 것만 보아도 이곳의 위치가 얼마나 좋은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청풍계는 간데없고 그림 속 후원에 보이는 ‘백세청풍’ 문구를 새긴 바위만이 어느 주택 아래에 남아있는데, 좀더 서쪽에 정 회장의 자택(현재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상속)이 있다. 정주영 회장이 그의 자서전에서 “우리집은 인왕산 아래 있는데 집 오른쪽으로는 커다란 바위가 버티고 서 있고 산골 물 흐르는 소리와 산기슭을 훑으며 오르내리는 바람 소리가 좋은 터”라고 소개한 그 곳이다.
‘백세청풍’은 ‘영원토록 맑은 기풍’이라는 뜻으로 백이·숙제의 충절 고사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백세청풍’ 바위를 후원에 둔 저택은 산속에서 고사리를 캐 먹었다는 백이·숙제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송희경 겸재정선미술관 관장이 ‘겸재 정선’전 도록에 쓴 글대로 ‘장동팔경첩’에 나오는 집들은 사대부의 “이중적 심리”의 소산이었다. 자연 속 백이·숙제의 삶을 동경하면서도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인 도시를 떠나기 싫은 심리, 그래서 도성 안에 자연을 끌어들인 아름다운 주거 공간을 지어 ‘시은(市隱·도시에서 은거)’을 하는 심리 말이다. 그리고 이런 시은은 재력과 권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청풍계 터 근처에 있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청운동 자택이 2021년 최초 공개된 모습. [연합뉴스]](https://www.koreadaily.com/data/photo/2025/05/23/0652f973-1cb4-497b-b0bc-fa3bf1bdafed.jpg)
“조심스러운 추정이지만 ‘장동팔경첩’에 등장하는 집들은 대부분 정선의 후원자들의 집이며, 그가 챙겨야 할 후원자들이 많았으니 이번 ‘겸재 정선’전에 나온 두 첩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마 각자 자기 집이 들어간 그림이 포함된 화첩을 소장하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장동 김씨가 시은의 욕망을 실현한 반면, 많은 다른 선비들은 실현하지 못한 채 매달렸다. 한양과 지방의 경제·문화적 격차가 심해진 까닭에 모두들 ‘인서울’에 열을 올리고 그 바람에 격차는 더욱 벌어지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송 관장은 실학자 정약용이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 구절을 소개한다.
“만약에 벼슬길이 끊어져 버리면 빨리 한양에 붙어살면서 문화의 안목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앞으로는 오직 한양의 10리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
또 다른 실학자 서유구는 당시 사람들이 한양 성문에서 10리 밖으로 나가면 “황폐한 변방”으로 생각하며 “비록 벼슬길이 끊어진 뒤라 하여도 그 후손들이 저자에서 한 발짝도 나가기 싫어한다”고 꼬집었다.
대선 후보들의 어설픈 지방 정책
이처럼 수도권 집중 현상, ‘서울공화국’의 폐해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뿌리 깊은 것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근대화의 부작용으로 지적되지만 사실 그 이전 조선시대에 기원을 둔 경우도 많다. 그만큼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때는 신중하게 다각도로 접근하며 풀어야 하는 것이다. 대선 캠페인이 한창인 지금, 후보들이 더욱 적극적인 지방분권 정책과 지방분권형 개헌을 말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조기 대선에서 어설픈 지방분권 정책은 말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서울공화국’을 그대로 둘 일도 아니지만, 지방의 고급 리조트에서도 젊은 인력을 구하지 못한다는 요즘, 인구 고령화로 인한 지역 소멸과 IT의 시대에 어떻게 지역 주민들의 행복한 삶을 끌어낼지 거점 도시 전략 등 다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문소영([email protected])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