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겸재 정선의 그림에 보이는 ‘서울공화국’의 뿌리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그림을 읽는 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형식주의 비평은 그림의 스타일, 구도 등의 독창성에 초점을 둔다. 모네의 인상주의나 피카소의 입체주의가 어떻게 혁명적인지 보는 것이다. 심리주의 비평은 작가의 개인적인 삶과 체험에서 비롯된 마음 상태가 그림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 뭉크의 어린 시절 가족의 불행이 어떻게 ‘절규’을 낳았는지 보는 식으로 말이다. 사회학적 비평은 그림이 그려진 당시의 정치·경제·사회적 환경이 그림의 창작과 수용에 어떻게 반영됐는지에 관심을 둔다. 밀레의 ‘이삭 줍기’가 단지 평화로운 농촌 풍경화가 아니라 당시 극심한 빈부격차를 암시했고 그래서 발표됐을 때 사회주의 논란이 일어났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장동팔경첩’에서 묘사한 장동
당시 돈 많은 권력자들의 부촌
도시인의 자연 동경 심리 투영
다산도 아들에 서울 거주 권유

진경산수는 사회 변화 산물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본)에서 ‘청풍계’. [사진 호암미술관]
평론가와 큐레이터는 대개 이 방법들을 모두 동원해 복합적으로 그림을 읽는다. 지금 삼성문화재단과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의기투합해 열고 있는 ‘겸재 정선’전(다음달 29일까지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의 그림들도 그렇게 복합적으로 읽을 수 있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 거장 겸재 정선(1676~1759)에 관한 한 역대 최대 규모 전시다.

기자가 특히 흥미롭게 보는 것은 당대의 사회적 배경이다. 일단 진경산수화 자체가 사회적 변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선의 시대인 18세기는 전란 이후 정치경제가 안정되어 우리 산천을 유람하는 문화가 크게 유행한 시기였다. 여행을 마친 이들이 기념을 위해, 또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 와유(臥遊·누워서 하는 유람)를 위해 화첩을 주문하면서 국보 ‘금강전도’ 같은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꽃필 여건이 만들어졌다.

또한 ‘인왕제색도’처럼 서울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 장동(壯洞), 지금의 서촌을 그린 그림들에서 머나먼 중국이 아닌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이상적 자연을 찾은 정선과 그의 후원자들의 낙관적 현실주의,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읽을 수 있다. 장동은 조선 후기 모두가 동경하던 부촌이었으며 수려한 자연 경관과 높은 부동산 가격을 자랑했다. 고관의 지위에 오른 안동 김씨는 장동에 살며 ‘장동 김씨’라 불렸다.

서울시 종로구 청풍계 터에 있는 ‘백세청풍’ 바위. 문소영 기자
그런 맥락에서 기자는 전시에 나온 두 버전의 ‘장동팔경첩’에 큰 흥미를 느껴 전시 기획자인 조지윤 리움미술관 소장품연구실장과 함께 그림 속 풍경의 현재 모습을 찾아보는 기획 기사를 썼다.(중앙SUNDAY 2025년 5월 10일 16~17면 ‘수성동 계곡 옛 모습 그대로? 알고보니 그림에 맞춰 복원’) 장동 김씨의 주요 저택이 있던 자하문로33길 청풍계 터와 옥인5길 청휘각 터를 실제로 돌아보니 그들의 당당한 위세를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웅장한 북악산과 인왕산을 뒤에 병풍처럼 두르고 왕궁을 가까이 두었으며 지대가 높아 서울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위치인 것이다.

훗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청풍계 터 근처에 자택을 마련한 것만 보아도 이곳의 위치가 얼마나 좋은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청풍계는 간데없고 그림 속 후원에 보이는 ‘백세청풍’ 문구를 새긴 바위만이 어느 주택 아래에 남아있는데, 좀더 서쪽에 정 회장의 자택(현재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상속)이 있다. 정주영 회장이 그의 자서전에서 “우리집은 인왕산 아래 있는데 집 오른쪽으로는 커다란 바위가 버티고 서 있고 산골 물 흐르는 소리와 산기슭을 훑으며 오르내리는 바람 소리가 좋은 터”라고 소개한 그 곳이다.

‘백세청풍’은 ‘영원토록 맑은 기풍’이라는 뜻으로 백이·숙제의 충절 고사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백세청풍’ 바위를 후원에 둔 저택은 산속에서 고사리를 캐 먹었다는 백이·숙제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송희경 겸재정선미술관 관장이 ‘겸재 정선’전 도록에 쓴 글대로 ‘장동팔경첩’에 나오는 집들은 사대부의 “이중적 심리”의 소산이었다. 자연 속 백이·숙제의 삶을 동경하면서도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인 도시를 떠나기 싫은 심리, 그래서 도성 안에 자연을 끌어들인 아름다운 주거 공간을 지어 ‘시은(市隱·도시에서 은거)’을 하는 심리 말이다. 그리고 이런 시은은 재력과 권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청풍계 터 근처에 있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청운동 자택이 2021년 최초 공개된 모습. [연합뉴스]
이런 가운데 정선의 ‘장동팔경첩’은 ‘인서울’에 성공한 데다가 최고의 부촌에 자리잡은 이들이 자신들의 집을 그림으로 남기기 위해 주문한 ‘사가도(私家圖)’라는 게 송 관장의 설명이다. 조 실장도 말했다.

“조심스러운 추정이지만 ‘장동팔경첩’에 등장하는 집들은 대부분 정선의 후원자들의 집이며, 그가 챙겨야 할 후원자들이 많았으니 이번 ‘겸재 정선’전에 나온 두 첩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마 각자 자기 집이 들어간 그림이 포함된 화첩을 소장하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장동 김씨가 시은의 욕망을 실현한 반면, 많은 다른 선비들은 실현하지 못한 채 매달렸다. 한양과 지방의 경제·문화적 격차가 심해진 까닭에 모두들 ‘인서울’에 열을 올리고 그 바람에 격차는 더욱 벌어지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송 관장은 실학자 정약용이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 구절을 소개한다.

“만약에 벼슬길이 끊어져 버리면 빨리 한양에 붙어살면서 문화의 안목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앞으로는 오직 한양의 10리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

또 다른 실학자 서유구는 당시 사람들이 한양 성문에서 10리 밖으로 나가면 “황폐한 변방”으로 생각하며 “비록 벼슬길이 끊어진 뒤라 하여도 그 후손들이 저자에서 한 발짝도 나가기 싫어한다”고 꼬집었다.

대선 후보들의 어설픈 지방 정책
이처럼 수도권 집중 현상, ‘서울공화국’의 폐해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뿌리 깊은 것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근대화의 부작용으로 지적되지만 사실 그 이전 조선시대에 기원을 둔 경우도 많다. 그만큼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때는 신중하게 다각도로 접근하며 풀어야 하는 것이다. 대선 캠페인이 한창인 지금, 후보들이 더욱 적극적인 지방분권 정책과 지방분권형 개헌을 말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조기 대선에서 어설픈 지방분권 정책은 말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서울공화국’을 그대로 둘 일도 아니지만, 지방의 고급 리조트에서도 젊은 인력을 구하지 못한다는 요즘, 인구 고령화로 인한 지역 소멸과 IT의 시대에 어떻게 지역 주민들의 행복한 삶을 끌어낼지 거점 도시 전략 등 다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문소영([email protected])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