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국왕 믿고 무소불위 권력 행사, 살길 찾아 나라 파는 짓까지
아첨해서 총애받은 신하, 폐행

원 간섭으로 왕권 불안해지자 급증
고려사에 별도로 ‘폐행전’ 만들 정도
폐행에 줄 대려는 발길 끊이지 않자
인사원칙 무너지고 감찰도 무력화
왕 바뀌면 폐행도 숙청, 혼란 더해
애꿎은 백성들 “이게 나라냐” 아우성
고려사에 별도로 ‘폐행전’ 만들 정도
폐행에 줄 대려는 발길 끊이지 않자
인사원칙 무너지고 감찰도 무력화
왕 바뀌면 폐행도 숙청, 혼란 더해
애꿎은 백성들 “이게 나라냐” 아우성
왕의 기호 따라 아첨법 달라
![조선 영조 때 만든 악보집 『대악후보』에 실린 고려 가요 ‘쌍화점’ 악보. 고려 충렬왕 때 폐행이었던 오잠이 지었다는 설이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이익주]](https://www.koreadaily.com/data/photo/2025/05/23/0be0f4e8-5760-49d2-a632-ed35937f62a3.jpg)
“옛날부터 소인배는 임금이 좋아하는 것을 엿보아서 영합하고 부추겼다. 때론 아첨으로, 때론 성색(聲色·노래와 여색)으로, 때론 사냥하는 매와 개로, 때론 가혹하게 착취한 재물을 바쳐서, 때론 토목공사를 일으켜서, 때론 특이한 재주나 술수로 임금이 좋아하는 바를 맞춰주고 총애를 구했다. 고려는 나라가 오래되었으므로 아첨해서 총애를 받은 신하가 많았으니 옛 기록에 의거하여 폐행전을 짓는다.”
임금마다 좋아하는 것이 달라서 누구는 여색을 좋아하고, 누구는 사냥을 좋아하고, 누구는 값비싼 재물을 좋아하고, 누구는 화려한 궁궐에 살기를 좋아했으니, 그때그때 임금의 기호를 살피며 아첨하는 신하가 있었다는 말이다. 권력자에게 아첨하는 사람이야 어느 시대엔들 없겠나 싶지만 고려 후기에 그런 사람이 유독 많았다. 조선 건국 후 『고려사』를 편찬할 때 굳이 폐행전을 따로 둔 것도 폐행 때문에 고려가 망했다는 생각에서였다.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휘둘렀던 명나라 환관 위충현의 초상. 고려는 환관의 활동을 엄격히 제한해 이들이 발호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이익주]](https://www.koreadaily.com/data/photo/2025/05/23/85572dec-777d-4bd6-85eb-f09b4325f97d.jpg)
고려 전기까지만 해도 띄엄띄엄 보이던 폐행이 몽골과 전쟁이 끝나고 원의 간섭이 시작되자 갑자기 많아졌다. 사람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정치 풍토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원의 간섭 아래서 국왕의 지위는 늘 불안했고 무조건 충성하는 신하를 필요로 했다. 그게 아니라도 직전의 무신집권기 100년 동안 억눌려 지냈던 고려 왕실의 아픈 기억 때문에 충성스러운 측근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터였다. 국왕이 필요로 하니 눈치 빠른 사람들이 몰려들어 아첨으로 충성 경쟁을 벌였다. 본래 국왕의 최측근 자리는 환관의 몫이었지만 고려에서는 환관의 정치 참여를 워낙 심하게 제약했으므로 발호하는 환관은 거의 없었다. 대신 궁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내료(內僚)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은 엄인(閹人·고자)이 아니었으므로 일반 관직으로 나아가 고관에 오를 수 있다는 점에서 환관과 달랐고, 그 폐해도 더 컸다. 내료는 7품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지만 이 원칙도 깨졌다.
반역자·천민 등 미천한 출신 많아
![원세조 쿠빌라이가 사냥하는 그림. 몽골인들은 매를 사냥할 때 고려에서 보낸 해동청을 선호했다. 충렬왕 때의 폐행들은 응방을 만들어 매를 진상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이익주]](https://www.koreadaily.com/data/photo/2025/05/23/241d64d5-b05d-4864-a24f-21a79dcb6227.jpg)
폐행의 출현은 관료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렸다. 근무 기간과 실적을 기준으로 하는 인사 원칙은 무너지고 국왕의 총애를 얼마나 받는지, 혹은 국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과 얼마나 가까운지가 승진의 조건이 되었다. 보통의 관리가 애써 올라간 자리 위로 천민 출신 폐행이 낙하산을 타고 덜컥 내려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니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권력자에게 아첨하는 것이 관료 사회의 풍조가 되고 인사철이면 좋은 관직을 얻으려 권력자의 집을 분주하게 찾아다니는 분경(奔競)이 줄을 이었다. 무너진 것은 인사의 공정성만이 아니었다. 감찰을 통해 불법·비리를 저지른 관리를 솎아내는 기능도 마비되었다. 고려는 중앙에 감찰사(監察司)를 두고 지방에는 안찰사(按察使)를 파견해서 관리들을 감찰하는 제도를 갖추어 놓았지만 폐행들의 위세 앞에 제대로 작동되지 못했다. 폐행의 불법 행위를 적발하고 처벌하려던 감찰관이 거꾸로 모함을 받아 처벌되기 일쑤였다. 충렬왕 때 폐행 윤수를 탄핵했던 감찰사의 관리 전원이 파직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고려사』는 그 기록 끝에 “마침내 언로가 막혔다”는 한 마디를 덧붙여놓았다. 이 뒤로 관리들이 국왕에게 바른말을 못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아첨으로 잔뼈 굵은 처세 달인들
![조선 효종의 국구(왕의 장인)인 장유의 초상화. 덕수 장씨는 충렬왕 폐행 장순룡이 시조지만, 고려 사회에 잘 정착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https://www.koreadaily.com/data/photo/2025/05/23/22d2e3af-6b25-410d-b8d3-a06e14ec4938.jpg)
고려 후기에 폐행이 득세하면서 능력 있는 사람이 인정받지 못하고 강직한 사람은 배척받으며 대다수 관리가 입을 닫고 눈치만 보는 세상이 되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되었다. 폐행이 백성들의 토지를 마구 빼앗고 양민을 억눌러 노비로 삼는 등 거침없이 불법을 저질러도 막을 길이 없었다. 그 시절 ‘국지불국(國之不國)’, 즉 “이게 나라냐!”는 아우성이 터져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된 일차적인 책임은 국왕에게 있었다. 원 간섭기의 국왕들은 하나같이 폐행을 키우고 가까이하면서 왕위를 보존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골몰했다. 이렇게 사적인 관계에 있는 폐행들의 권력 행사를 방조했으니 국가 권력이 삿된 것이 되고 국왕의 권위는 실추될 수밖에 없었다. 최고 권력자가 공사 분간을 못 하고 권력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자기 살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는 미래가 없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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