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장례식…웃음으로 채웠다

25일 강원도 강릉 순포해변에서 연극계 대모, 배우 박정자(83)의 ‘사전 장례식’이 열렸다.
연두빛 꽃무늬 원피스, 빨간 구두 차림의 박정자가 춤을 추며 자신의 상여 행렬을 이끌었다. 문상객들이 손에 든 만장에는 ‘위기의 여자’ ‘19 그리고 80’ 등 연극인생 63년 박정자가 출연한 작품 이름들이 적혔다. 150개 넘는 만장이 겹치는 이름 없이 바닷바람에 펄럭였다. 긴 행렬을 소프라노 임선혜의 노래가 따라갔다.
“그냥 나 편히 보낸다 생각하오 이 노래 한자락 들려주고 떠나오 그대여 그냥 웃음만 환한 웃음으로…”
이날의 장례식은 배우 유준상이 제작·감독을 맡은 영화 ‘청명과 곡우 사이’의 마지막 장면 촬영 현장이기도 했다. 만물이 초록으로 바뀌는 청명과 곡우 사이의 봄날, 노배우가 신나게 죽음을 맞는 장면이다. 영화의 모티브이자 주인공인 박정자가 이 장면에 등장할 문상객들로 실제 지인을 초대해 ‘사전 장례식’으로 꾸몄다.
그가 일일이 초대장을 보내고 전화를 걸어 청한 문상객들은 함께 무대에 섰던 배우들뿐 아니라 소리꾼 장사익, 화랑 대표 박여숙, 무대 디자이너 박동우, 건축가 유병안,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 등 문화예술계 명사들을 아울렀다. 그의 남편인 이지송 CF 감독과 1남1녀 자녀들도 함께했다.
전날인 24일 저녁에는 대관령 기슭 강릉 카페에서 ‘장례식 전야제’ 행사가 펼쳐졌다. 미리 보낸 부고장에서 당부한 대로 참석자들은 ‘오래된 이야기’와 ‘가벼운 농담’을 들고 왔다.
배우 양희경은 1998년 ‘넌센스’ 공연 일화를 끄집어냈다. “첫 공연에서 대사를 까먹으셨던 거다. 무대에서 갑자기 나를 향해 ‘허버트 수녀, 뭐부터 시작하지?’라고 하시더라”면서 “‘연기의 신’한테도 이런 일이 있구나 했다”고 말했다.
연극배우 오지혜가 “1991년 스물네살 때 선생님 딸 역을 맡았는데 무서워서 선생님 눈도 못 쳐다봤다. 지금은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하자 웃음이 터졌다.
그의 말대로 박정자는 공연계 유명한 ‘호랑이 선생님’이다. 엄격한 그의 연기 기준에 못 미치는 후배들에겐 불호령이 떨어진다. 하지만 일상의 그는 다정한 배려로 기억됐다. 배우 김호영은 “서른살에 뒤늦게 군대에 갔는데 선생님이 패션 감각 잃으면 안 된다며 매달 남성 패션 잡지를 보내주셨다”고 전했고, 오지혜 역시 “아이를 낳았을 때 선생님이 기저귀를 가득 보내주셨다. 그 애기가 지금은 스물다섯살”이라고 했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김종규 전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신현웅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등은 각각 ‘박정자 남자친구’ 1, 2, 3호를 자처했다. 시인 박용재는 “선생 묘비명은 아마도 ‘너 언제 내 연극 보러 올래?’일 것”이라며 ‘고인’의 연극 열정을 기렸다. 배우 강부자는 “이 많은 사람이 여기까지 오다니, 박정자의 능력·추진력·인복이 부럽다”고 했다.
이틀 간의 장례식 행사를 마친 박정자는 “나의 삶을 배웅하는 사람들을 내 눈으로 보게 돼 행복하다”고 말했다. “헤어지는 장면도 축제처럼 해보고 싶었는데, 웃으면서 떠날 수 있어 좋다”면서다.
이지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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