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치적 압력 버텨내는 미국 대학의 비결

트럼프 정부, 대학에 노골적 외압
풍부한 기금으로 자율·독립 지켜
인재의 보고인 대학을 아껴줘야
풍부한 기금으로 자율·독립 지켜
인재의 보고인 대학을 아껴줘야
1990년대 초중반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그런 모습을 부럽게 지켜봤다. 당시 앨 고어 부통령이 ‘정보고속도로’를 깔자는 비전을 제시하며 디지털 문명 시대를 이끌 인재 양성을 대학에 호소했다. 그렇게 뿌린 씨앗이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는 구글·아마존·메타 등 초거대 기술 기업으로 결실을 보고 있다.
미래를 예견한 정치 지도자들의 혜안과 그 비전을 실천에 옮긴 정부의 정책 역량이 있어서 가능했다. 사회가 대학에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자율적 공간을 열어줬고, 대학 스스로 권력의 외압으로부터 독립된 학술 생태계를 만들었다. 대학은 혁신으로 사회의 관심과 지원에 보답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런 독립과 자율 덕분에 지금도 미국 대학에 중국·인도의 인재들이 모여들어 정보기술(IT)과 인공지능(AI) 혁신을 이루고, 동유럽 여성 과학자가 이주해 미국에 노벨상을 안겨준다.

연구비를 줄이고 기부금마저 옥죄는 연방정부의 밀어붙이기식 조치 앞에 오랜 전통의 아이비리그 대학들마저 흔들리고 있다. 예산이 줄어들어 이미 선발한 석·박사 과정 학생의 입학을 취소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정치적 억압과 연구 환경 악화를 못 견딘 인재들이 자국으로 돌아가거나 유럽의 대학으로 옮겨가고 있다.
미국 대학들이 겪는 초유의 사태는 미국 사회에 심각한 상처를 남길 것이다. 설령 당장은 크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5년 뒤, 10년 뒤, 20년 뒤에 지금 이 파동은 큰 후유증으로 나타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3년 반 이후면 무대에서 사라지겠지만, 후대는 미국 대학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긴 인물로 기억할지 모른다.
미국 대학들이 정부의 압력에 맞서며 대학의 자율과 독립을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이 특히 인상 깊다. 세계 최고 대학이라는 상징성이 큰 하버드 대학에 트럼프 정부의 탄압이 집중되자 220여 개 대학 총장이 “정부가 대학을 통제해 미국 교육을 위험에 빠뜨린다”며 성명을 발표했다. 여론도 이런 움직임에 힘을 실어줬다. 대학의 자율과 독립을 지키는 것이 미국 사회의 미래를 지키는 길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미국 주요 대학들의 든든한 재정 기반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하버드 대학의 기금은 무려 500억 달러(약 71조 원)다. 다른 주요 대학들도 수십조원의 기금을 운용한다. 풍부한 기금은 대학이 정부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고 학문 공동체의 자율과 독립을 지키도록 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반면 한국 대학의 현실은 어떤가. 미국 대학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재정 기반이 취약한 한국의 대학들은 자율과 독립을 말하는 것이 사치일 지경이다. 그러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 정권의 성향과 정책 방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정부의 단기적 지원에 목을 매는 처지다. 이런 현실에서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대학 풍토나 미래를 위한 혁신이 가능할까.
미국 대학의 위기조차 부러워하는 한국 대학의 현실이 안타깝다. 시대가 바뀌어도 인재를 길러내는 곳은 여전히 대학이고, 대학의 경쟁력은 곧 국가와 사회의 경쟁력이다. 가진 자원이 인재뿐인 한국은 왜 인재의 보고인 대학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가.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재영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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