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조선의 정치사부터 인류 보편적 가치까지, 곳곳에 어린 종묘를 걷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문화유산, 하면 경복궁이나 덕수궁 등 조선시대 궁궐이 먼저 떠오르기 마련인데요. 체험학습이나 소풍, 가족 나들이 등으로 궁궐에는 가본 적 있어도 종묘라는 이름은 왠지 낯설죠. 종묘는 조선왕조 500년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곳입니다. 조선시대 문화유산 중 가장 이른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죠. 조선시대 정치사와 유교문화의 정수가 담긴 상징적인 곳, 종묘가 5년여에 걸친 정전 보수 공사를 마치고 지난 4월 완전한 모습을 공개했어요.
종묘는 쉽게 말해 조선왕조의 사당입니다.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죠. 추존이란 살아있을 때는 왕과 왕비가 아니었지만 아들이 왕이 돼 사후 왕과 왕비로 모신 거예요. 종묘제례는 종묘에서 행하는 제례의식, 종묘제례악은 그때 쓰이는 음악이죠. 종묘제례는 왕이 직접 행하는 가장 격식이 높고 큰 제사로 왕과 왕세자, 종친은 물론 문무백관 등 제관이 참가했어요.
조선시대에도 중요했던 종묘와 종묘제례는 현재도 국보(정전·正殿)이자 국가무형유산(중요무형문화재)이자 세계문화·무형유산입니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에서 관리하죠. 최근 긴 보수공사를 마치고 특별전을 연다는 소식에 소중 학생기자단이 종묘로 향했어요. 전시 ‘삼가 모시는 공간, 종묘’를 기획한 이충선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학예연구사(이하 연구사)를 만난 이현우·황지유 학생기자가 종묘의 탄생부터 궁금증을 쏟아냈죠.
삼가 모시는 공간, 종묘

종묘는 크게 정전·영녕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를 모시는 공간과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나뉘어요. 대지 면적은 5만6000여 평에 달하죠. 주요 건물이자 국보인 정전은 세계에서 가장 긴 목조 단일 건물로 꼽힙니다. 중국 주나라에서 시작된 종묘는 7대까지 모시는 제도였다가 9묘로 확대됐는데요. 이에 중국의 경우 신주를 모시는 신실이 9실에 불과하지만, 조선은 정전의 신실이 총 19칸이나 되죠. 정전 19실에 왕과 왕비 49위의 신주를 모시면서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성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으로 나타난 건축 유형입니다.

“조선왕조 왕 27명 중 종묘에 없는 왕은 누구이며 왜 고려 공민왕의 사당도 만들었나요?” 현우 학생기자의 질문에 이 연구사는 “조선과 대한제국 총 27명의 왕과 황제 중, 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은 종묘에 신주를 모시지 않았다”며 “고려 31대 왕인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모신 사당을 공민왕신당이라고 하죠. 종묘에 고려 공민왕의 영정을 모신 이유는 관련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 건국의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합니다”라고 설명했죠.

현대의 보수공사와 조선시대 증수공사
“의궤란 일종의 보고서로 종묘를 이렇게 수리하고 증축했다는 내용을 담았어요. 조선 전기 의궤는 임진왜란 등으로 소실돼 실록 등을 참고해 관련 내용을 파악하고요. 조선 후기에는 종묘 관련 의궤가 셋 남아있는데, 이번 행사에 참고한 『종묘영녕전증수도감의궤』는 헌종(재위 1834∼1849) 대인 1835∼1836년 증축 과정을 정리한 것으로, 공사에 참여한 사람 수부터 공사 비용, 지급한 대가 등 관련 내용이 자세히 나오죠. 이안·환안 과정은 그림으로도 실렸어요.”

“5년이나 보수공사를 한 이유”를 궁금해한 지유 학생기자가 “보수하면서 새로 알게 된 역사적 사실이나 우리가 잘 모르는 비밀의 역사 같은 게 있는지” 물었어요. “종묘 같은 문화유산은 정기적으로 검사해요. 그래서 전에도 담장·지붕·월대 등 부분적으로 보수했었죠. 이번에 2020년부터 5년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게 된 건 2015년 정전 안전조사 결과 내부 목부재가 틀어지고 기와가 들뜨며 처마선이 변경되는 등 문제를 발견해서죠. 이번 보수 과정에서 1726년 영조 때 종묘 정전을 증축하면서 넣은 상량문이 발견됐는데요. 상량문은 목조 건축 과정에서 최상부 부재인 종도리를 올리는 상량식에 사용되는 축문입니다. 정전 11실 지붕에서 목부재 해체 중 발견돼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중이죠. 이 상량문 내용과 영조대 증수 과정을 기록한 『종묘개수도감의궤』 내용이 일치해 영조대에 작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과 함께 불타버린 종묘는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며 중건됩니다. 이후 조선의 역사가 깊어지는 만큼 모셔야 할 신주가 늘어나며 1667년(현종 8), 1726년(영조 2), 1836년(헌종 2) 세 차례에 걸쳐 증수돼요. 지금 우리가 보는 종묘의 규모는 헌종 때 증수된 겁니다. “임진왜란 이전 종묘의 모습은 『국조오례의서례』에 실린 그림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다”고 한 이 연구사는 “광해군 때 종묘를 중건하며 조선의 전통을 유지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이후로도 기존 제도를 따랐다”며 “이번 보수공사 역시 사람의 손으로 만드는 전통기법을 원칙으로 최대한 옛 자재를 보존·보강해 다시 쓰며 수제 기와를 올리고 수제 전돌을 까는 등 종묘의 역사성을 지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각 자재의 원래 위치를 정확히 기록·파악하는 게 매우 어려웠던 점 중 하나”라고 설명했죠. 5년간의 전면적인 정전 보수공사 과정은 영상으로 볼 수 있었어요.

조선시대 종묘의 건축부터 신주의 이·환안 과정, 최근 보수공사까지 총 3부 구성의 전시는 정전 지붕 잡상 소개로 마무리돼요.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한 상징물이자 장식 기와로 지붕 양 끝 추녀마루 위에 올렸죠. 대당사부(삼장법사)를 비롯한 서유기 등장인물과 토신(土神)을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졌어요. 보통 지붕 위에 있어 자세한 생김새를 몰랐던 잡상을 복제품으로 자세히 관찰한 소중 학생기자단은 망묘루 누마루에 올라 열린 창을 통해 잠시 조선의 왕처럼 정전과 영녕전 쪽을 굽어본 뒤 툇마루에 앉아 이 연구사와 인터뷰를 이어갔죠.
‘세계유산’ 종묘의 가치

유교사회에는 길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家禮)의 다섯 의례(五禮)가 있는데 그중 길례인 제사를 으뜸으로 여겼으며, 이를 ‘효’ 실천의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정전에서는 사계절의 각 첫 달에 정해진 날과 납일(臘日·동지(冬至) 후 세 번째 미일(未日))을 합쳐 1년에 다섯 번, 영녕전에서는 봄·가을 정해진 날에 두 번 제례를 행했죠. 이외에도 홍수·가뭄 같은 자연재해나 질병·전쟁 등이 발생했을 때와 책봉·관례·혼례·흉례를 비롯해 천신(薦新·새로 농사지은 과일이나 곡식을 먼저 사당에 올려 조상에게 감사를 전하는 예)과 천금(薦禽·사냥해서 잡은 짐승을 먼저 올리는 예) 등이 있을 때도 종묘에서 제례를 지냈어요. 종묘제례악은 세종대에 아악을 정비한 후 만든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현재 각각 11곡)이라는 음악을 중심으로 조상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문덕과 무공을 칭송하는 일무(佾舞·문무와 무무)를 추죠.

“고종이나 순종과 같이 일제가 침략한 때에도 종묘제례가 유지됐는지” 물은 현우 학생기자는 “왕이 없는 지금은 어떻게 제사를 지내는지” 알려달라고 했죠. 이 연구사는 “일제강점기에는 유지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해방 이후 다시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렀고, 현재는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춘향대제)과 11월 첫째 주 토요일(추향대제)에 종묘에서 종묘제례를, 왕릉에서는 돌아가신 날에 기신제를 지낸다”고 설명했죠.

실제로 만나는 종묘

종묘 정전은 국가를 상징하는 중요한 건물이지만 건축 자체는 화려하지 않고 단청 또한 절제돼 단순하면서도 숭고한 품위와 장중함을 보입니다. 화강석으로 기단을 쌓은 상월대 위에 신주를 모신 19칸의 신실을 중심으로 양쪽에 협실이 각 3칸, 동·서월랑 각 5칸이 설치됐어요. 각각 제기를 보관하는 동협실과 제사를 준비하는 퇴간·동월랑, 신여·병풍 등을 두는 의물고로 쓰인 서협실과 창고처럼 지어진 서월랑이죠. 정전의 신실에는 1실 태조고황제·신의고황후·신덕고황후부터 19실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순정효황후까지 공덕이 있는 왕과 황제 19위와 왕비·황후 30위의 신주가 모셔졌어요.
사방을 담장으로 두른 정전의 구역에는 종묘제례가 거행되는 넓은 월대가 설치됐습니다. 가로 109m, 세로 69m의 월대에는 거친 박석을 깔고 신도와 어도, 제관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판위에는 전돌을 깔았죠. 개국공신 등 83위의 위패를 모신 공신당 및 생활과 밀접한 일곱 신을 모신 칠사당이 정전의 남신문 동서쪽에 자리합니다. 남신문은 3칸에 맞배지붕을 올린 삼문의 형식이지만, 혼령들이 출입하는 신문(神門)으로 사용하며 정전 신실까지 월대를 가로지르는 신도로 연결됐죠. 국왕을 비롯한 제례에 참여하는 인원들은 동문을 통해 출입하고, 제례악을 연주하는 악공과 춤추는 일무원들은 서문을 이용했어요.

외대문에서 정전에 이르는 길에는 널찍하고 거친 박석이 깔린 삼도(三道)가 길게 나 있습니다. 동측은 왕이 다니는 어로(御路), 서측은 세자로며 양옆보다 약간 높은 가운데 길은 조상신이 다니는 신로이므로 걷지 않는 게 예절이죠. 삼도를 따라 나오며 마지막까지 예와 효에 대해 배운 소중 학생기자단은 현재에 이른 종묘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동행취재=이현우(인천 중산초 4)·황지유(서울 봉은초 6) 학생기자

소중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조선 왕과 왕비들의 신주가 잠들어 있는 곳, 종묘를 다녀왔습니다. 종묘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만들었죠. 조선은 유교를 중심으로 세워졌고, 유교에서는 효가 중요했기에 궁궐 왼쪽에 역대 왕들의 신주를 모시는 종묘를 지은 겁니다. 종묘는 5만6000평이나 돼 엄청 넓은데, 건물은 별로 없고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요. 도시 한복판 신비로운 숲속 종묘는 정전·영녕전처럼 제사를 지내는 공간과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나뉘어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복구해 임진왜란 전 종묘의 모습은 아무도 모른다는 게 아쉬웠죠. 전쟁은 인류의 목숨도 위협하지만 세계의 문화재도 파괴하는 몹시 나쁜 것이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도 어서 전쟁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선왕조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돌아가신 왕들이 많아져 정전과 영녕전은 계속 커졌는데요. 정전 등은 어떤 공간인지 알려주는 설명과 축소 모형이 함께 있고, 모형은 만져볼 수 있는 데다 점자도 있어 장애인도 함께 볼 수 있게 만든 것 같아요. 종묘를 둘러보며 할아버지 제사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집에는 사당은 없지만요. 제사가 돌아오면 할아버지 생각이 더 많아지고 너무 보고 싶어요. 그런 후손들의 마음 때문에 조선왕조는 무너졌지만, 종묘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게 아닐까요.
-이현우(인천 중산초 4) 학생기자
처음 가본 종묘의 망묘루에서 이충선 학예사님과 만나 ‘삼가 모시는 공간, 종묘’ 전시를 보고 종묘와 영녕전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5년이란 긴 공사를 하며 정전 11실에서 영조시대 종묘 수리 상량문을 발견한 게 무척 놀라웠죠. 왜 11실에서 발견됐는지 의문과 함께 다른 곳에도 있을 거 같은데 더 발견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종묘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곳인데 왜 고려 공민왕의 영정이 있는지 궁금했는데, 짧게 설명을 들으니 자세히 알고 싶어졌어요. 학예사님 인터뷰를 마치고 종묘를 둘러보는데, 아무래도 오랜만에 문을 열어서인지 관람객이 많아 해설사님의 설명을 잘 듣지 못한 건 아쉬웠죠.
-황지유(서울 봉은초 6) 학생기자
-이현우(인천 중산초 4) 학생기자
처음 가본 종묘의 망묘루에서 이충선 학예사님과 만나 ‘삼가 모시는 공간, 종묘’ 전시를 보고 종묘와 영녕전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5년이란 긴 공사를 하며 정전 11실에서 영조시대 종묘 수리 상량문을 발견한 게 무척 놀라웠죠. 왜 11실에서 발견됐는지 의문과 함께 다른 곳에도 있을 거 같은데 더 발견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종묘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곳인데 왜 고려 공민왕의 영정이 있는지 궁금했는데, 짧게 설명을 들으니 자세히 알고 싶어졌어요. 학예사님 인터뷰를 마치고 종묘를 둘러보는데, 아무래도 오랜만에 문을 열어서인지 관람객이 많아 해설사님의 설명을 잘 듣지 못한 건 아쉬웠죠.
-황지유(서울 봉은초 6) 학생기자
김현정([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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