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한미동맹 상수로 두고 한중·한러 관계 개선 고민해야
과거 변수로 본 남북관계, 새 정부 과제는

남북관계와 북중 관계는 반대로 움직여, 남북 사이 좋을 때 북중 냉랭
북 내부 사정이 가장 큰 변수지만 어떤 작용할지 정확한 파악 어려워
남 경제 성장과 민주화, 진보·보수 정권 교체 따라 남북관계 출렁거려
중의 한국인 비자 면제 등 전환 국면 활용해 남북관계 주도권 쥐어야
북 내부 사정이 가장 큰 변수지만 어떤 작용할지 정확한 파악 어려워
남 경제 성장과 민주화, 진보·보수 정권 교체 따라 남북관계 출렁거려
중의 한국인 비자 면제 등 전환 국면 활용해 남북관계 주도권 쥐어야

보수와 진보의 남북관계
분단과 정전체제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남북관계에서 비롯된다.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남북관계는 한반도의 생존의 문제이기에 어떤 분야보다도 시급하고 근본적인 문제다. 남북관계는 시기마다 출렁거렸다. 지난 80년간 남북 간의 관계는 정체되어 있지 않았다. 진보정부라고 남북관계가 항상 좋았던 것도 아니었고, 보수정부였다고 항상 나쁘지는 않았다.
7·4 남북 공동성명과 적십자 회담(1971~1972년), 북한의 대남 수해 지원과 이산가족 상봉(1984~1985년),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1991년), 그리고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에 의한 북한 경수로 건설 지원(1994~2006년)이 모두 보수정부에서 실행되거나 시작되었다. 반면 두 차례의 연평해전(2000·2002년)과 남북공동사무소 폭파(2020년)는 진보정부 하에서 일어났다.
이러다 보니 문제는 남북관계가 항상적이지 못하며 미래를 전망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남한 정부가 북한에 대해 포용정책을 취하느냐가 중요 요인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정책에는 장기간의 계획이 있고 그 계획에 따라 중단기 계획을 세운다. 남북관계는 주식시장과 비슷해서 장기간의 계획을 세울 수가 없다. 변수가 너무나 많고 언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변수 1: 남한 사회의 변화
그렇다면 지난 80여년 간 역사에서 남북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변수들은 무엇이 있었을까? 첫째로 남한 사회의 변화였다. 본래 북한은 민주기지론에 근거해서 한반도 전체의 공산혁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1950년 남침의 실패, 그리고 1960년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으로 변화했다. 남한 사회 스스로가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성장은 남북관계를 또 한 번 변화시켰다. 1980년대 중반 남북한 간의 상호 수해 복구 원조가 있었다. 1994년 이후 제네바 합의 이후에는 보수정부에서 북한에 경수로를 건설하기 위한 지원을 했다. 2000년 이후 북한은 햇볕정책을 수용했고, 남한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았다.
여기에는 1987년 민주화 이후 북한이 더 이상 남한을 미국의 괴뢰나 독재사회로 비난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졌다는 사실도 중요하게 작동했다. 북한은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한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기적이지는 않았지만 1991년 고위급회담에서부터 2000년 이후 몇 차례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변수 2: 미·중 관계
둘째로 미중관계의 변화였다. 미·중 간의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1971년 이전까지 남북이 한 테이블에 앉아서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미국이 데탕트 정책을 시작하고 대통령 안보보좌관인 키신저와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직접 방문했던 시기 동서독이 기본합의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남·북도 적십자 회담을 하면서 7·4 공동성명까지 발표했다.
닉슨 대통령은 교차승인을 추진하기도 했다. 중국과 소련이 남한을 승인하고,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승인함으로써 동북아시아에서 안정된 평화체제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남베트남의 패망으로 교차수교가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1979년 미·중 간의 정식 수교로 이어졌고, 1980년대 남북 간의 접촉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미중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한 1990년대에 중국은 북한 핵문제를 해결을 위한 4자회담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2000년대에는 6자회담에도 적극 참여했다. 미중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한 오바마 행정부 이후 남북관계는 돌파구를 찾기 어려웠고 2017년에는 전쟁 직전의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변수 3: 한·중 관계
셋째로 한중관계이다. 한국 정부는 미중수교가 이루어진 1970년대 후반 이후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노력했다. 북한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1983년 중국 민항기 공중납치 사건 때 처음으로 한국과 중국 정부 사이에 접촉이 있었지만 한중수교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북중관계가 공고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1990년대 초였다. 중국은 천안문 사건으로 국제적으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반면 한국은 3저 호황을 통해 1980년대 후반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아울러 1987년 민주화와 1988년 올림픽 게임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북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한중수교를 강행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1991년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가 모두 철수한 직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함으로써 큰 파장이 있었다. 1992년 한중수교를 통해 더 이상 중국이 북한에게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이 될 수 없었다.
그만큼 한중수교는 북한의 모든 정책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후 북중관계는 남북관계와 연동하여 거꾸로 움직였다. 남북관계가 좋을 때는 북중관계가 좋지 않았다. 반대로 북중관계가 좋았던 시기는 남북관계가 좋지 않았다. 남북관계와 북중관계가 모두 좋았던 시기는 2018년의 북미 정상회담이 있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변수 4: 북한 내부 사정
마지막으로 북한 내부의 상황이다. 어쩌면 이 부분이 남북관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일지도 모른다. 북한 내 구세대와 신세대가 존재하기 때문에 냉전을 경험했던 구세대는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진전에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북미관계가 좋았던 1994년과 1995년 북한은 지속적으로 비무장지대에서 도발을 감행했다. 2018년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지도부에서 이를 번복했던 것은 북한 내부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북한 내부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북한 내부의 상황이 어떤 변수로 작용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최근 북한은 남한의 풍선을 더 문제 삼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남북관계의 문제를 북한 내부에서의 문제보다 남한 내부의 문제로 넘기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이 폐쇄사회라 이 또한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핵심은 한·중 관계
이상과 같이 남북관계에서 가장 큰 변수가 되는 것은 남북한의 상황, 미중관계, 그리고 한중관계이다. 이 중 남한의 정치와 경제 상황은 현재 모두 불안한 상황이지만 지난 100년간 한국 사회가 보여주었던 저력을 감안한다면 잘 극복해 나갈 가능성이 있다. 북미관계는 한국이 개입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북한 내부도 외부에서 바꾸기 쉽지 않다.
이제 남은 가장 중요한 변수는 한중관계이다. 한국의 경제를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한중관계는 남북관계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물론 북한의 러시아 파병으로 인해 또 다른 변수가 발생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북한의 러시아 파병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러시아와의 관계개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는 남북관계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기 위한 것이다. 한미동맹이 변하지 않는 조건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중국·러시아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특히 북한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한중관계의 개선은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될 수 있다.
중국이 한국인에 대한 비자를 면제했고 한한령을 해제한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지금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다. 민주화 이후 2017년에 이어 두 번째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없이 출범할 새 정부는 광복 80년, 이만큼 성장한 한국에 걸맞은 외교정책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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