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츠, 트럼프 '독일 혈통' 공략하며 러 압박 요청

독일서 태어난 조부 출생증명서 액자에 넣어 선물 트럼프, 난민강경책 칭찬하며 메르켈 비판…獨매체 "험담 동지"

메르츠, 트럼프 '독일 혈통' 공략하며 러 압박 요청
독일서 태어난 조부 출생증명서 액자에 넣어 선물
트럼프, 난민강경책 칭찬하며 메르켈 비판…獨매체 "험담 동지"


(베를린=연합뉴스) 김계연 특파원 =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5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독일 혈통'을 강조하며 러시아를 압박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서로 미워하며 싸우는 아이들에 빗대는 등 냉랭한 태도를 보였다.
메르츠 총리는 이날 미국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에 앞서 금박 액자를 선물했다. 액자 속에는 독일 태생인 그의 할아버지 프레데릭 트럼프(독일 이름 프리드리히 트럼프)의 출생증명서 사본이 담겼다. 조부 트럼프는 1869년 3월 당시 바이에른 왕국인 독일 남서부 라인란트팔츠주에서 태어나 1885년 미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르츠 총리는 트럼프 집안의 이민 배경에 대해 "미국과 독일이 긴밀하게 협력하는 데 좋은 기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시작한 1944년 6월6일을 언급하며 "내일이 디데이라는 점을 상기시켜드리고 싶다. 우리 나라가 나치 독재에서 해방된 날"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이 전쟁(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강력한 위치에 있다고 말하는 이유"라고 했다.


메르츠 총리는 집안 내력과 양국 과거사로 분위기를 푼 뒤 "우크라이나 전쟁을 멈추기 위해 러시아에 대한 추가 압박을 구상 중"이라며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확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서로 싸우는 아이들에 빗대어 "가끔은 그들이 한동안 싸우도록 한 뒤에 그들을 떼어 놓는 것이 좋다고도 했다.
메르츠 총리는 이같은 비유에 직접 대꾸하는 대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민간인을 표적으로 삼지 않는다"고 에둘러 반박했다.
독일 정부는 앞서 양국 정상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정세, 무역 정책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우리는 석유와 가스가 아주 많다. 여러분이 모두 사갈 수도 없을 것"이라며 에너지를 유럽연합(EU)과 무역협상에 활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다만 세 가지 사안 모두 독일이 직접 협상 상대가 아닌데다 기자들 질문도 일론 머스크의 감세안 비판 등 미국 국내 정치에 쏠려 메르츠 총리가 말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메르츠 총리도 회담에 앞서 기자들에게 "대단한 돌파구가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독일 매체들은 미국 국내 문제로 대화가 쏠린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분위기다. 앞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백악관 정상회담 도중 트럼프 대통령의 돌발 발언에 곤욕을 치렀기 때문이다.
극우정당 독일대안당(AfD)과 협력을 차단하는 독일 정치권의 '방화벽' 원칙, 자동차 무역 불균형, 독일 정부가 최근 추진하는 디지털세 도입 등 트럼프 대통령의 심기가 불편할 만한 사안은 대화에 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메르츠 총리가 중도보수 기독민주당(CDU) 내에서도 보수 쪽에 가깝고 자산운용사 블랙록 독일법인 이사회 의장을 지낸 친기업 성향 인사여서 트럼프 대통령과 거리감이 크지 않았을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히려 독일의 국방비 확대 계획과 불법이민 차단 정책을 칭찬했다. 그러면서 이전 독일 정부의 난민 포용 정책을 두고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다. 그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그녀(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에게 말했다"며 집권 1기 때 앙숙이었던 메르켈 당시 총리에게 뒤끝을 보였다.

취임한 지 한 달 된 메르츠 총리로서는 별 탈없이 대서양 외교무대 데뷔전을 치른 셈이 됐다. 독일 매체 슈피겔은 "메르츠의 발언은 몹시 적었지만 자신의 주장을 분명히 했다"며 "트럼프를 먼저 만난 다른 나라 정상들 조언대로 트럼프의 짧은 집중력을 고려해 혼자 너무 오래 말하지도 않았다"고 논평했다.
메르츠 총리는 앞서 트럼프 대통령을 조부의 고향으로 초청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또 백악관 인근 영빈관인 블레어하우스에서 전날 밤 묵게 해준 보답으로 19세기 미국으로 건너간 독일 출신 이민자들의 편지 모음집을 선물하기도 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조부의 출생증명서 선물을 딱히 반기는 기색은 없었다는 게 독일 매체들의 평가다.
트럼프 대통령은 부동산 사업가 시절인 2014년 언론 인터뷰에서 "독일 피를 가진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미국 우선주의를 비판한 메르켈 전 총리와 대립각을 세웠다.
쥐트도이체차이퉁(SZ)은 "트럼프는 이 독일인(메르츠)에게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메르켈이 아니기 때문"이라며 "함께 메르켈을 험담하기 좋은 동지로 보는 듯하다"고 전했다. 메르츠 총리는 2000년대 초반 당내 권력투쟁에서 자신을 밀어낸 메르켈 전 총리와 오랫동안 정적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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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