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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싶지만, 몸은 그날을 기억했다

박종철 열사가 사망한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가 추모공간으로 복원됐다. 그의 사망이 중앙일보 특종으로 알려지자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주장했다. 이영근 기자
연성수(71)씨는 1985년 10월 8일을 잊지 못한다. 경찰 대여섯 명이 사무소로 들이닥쳤다. 연씨는 그길로 차에 태워져 어디론가 끌려갔다. 눈은 가려졌지만 소리만은 선명했다. 탱크가 지나가는 듯한 육중한 철문 소리, 좁고 가파른 철계단을 오를 때마다 쿵쿵 울리는 소리…. 서울 남영역 하행선 담장 너머 있는 대공분실. 일명 ‘검은 벽돌집’으로 불렸던 고문실이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사건에 연루돼 불법 구금된 연씨는 20여 일을 밤낮으로 고문당했다. 한 뼘 길이 창 사이 빛으로 시간을 가늠했다. 10일 동안 변기 물만 마시면서 버텼다. 연씨는 “10년 전쯤 나선형 철계단에 다시 발을 딛는 순간 심장이 벌렁거렸다. 훌륭히 싸워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고문을 기억했다”고 말했다.

국가폭력의 상징인 남영동 대공분실이 6·10 민주항쟁 38주년을 맞아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10일 정식 개관했다. 행정안전부 산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이재오)는 이날 ‘다시,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개관식을 진행했다. 기념관은 대공분실 고문 현장과 고문 관련 전시물을 볼 수 있는 구관(M2)과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관람할 수 있는 신관(M1)으로 구성됐다.

구관 1층에 들어서면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로 재현한 나선형 철제계단을 밟는 소리가 관람객을 맞는다. 고문실로 사용했던 5층은 모두 15개의 조사실이 있다. 조사실에는 욕조, 변기, 침대 등 사실상 고문 도구로 활용된 기물들이 배치돼 있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존재를 폭로한 고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고문을 당한 515호에 비치된 방명록엔 시민들의 추모사가 가득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고(故)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숨을 거둔 509호 조사실은 원형 그대로 보존됐다. 이날 대공분실을 찾은 박 열사의 형 박종부(67)씨는 “동생이 죽은 뒤 38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고 대공분실이 민주화기념관으로 거듭나 기쁘고 뿌듯하다”며 “민주주의는 죽어가는 것 같아도 다시 살아나는 복원력이 있다고 믿는다”고 소회를 밝혔다.

신관은 ‘역사를 마주하는 낮은 시선’이라는 건축적 의미를 담아 지하 2층까지 내려가는 동선으로 설계됐다.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등 주요 민주화 운동과 학생·노동·언론·종교계·여성 등이 펼친 민주화 운동을 디지털 미디어 패널로 조명한다.

이날 개관식에는 우원식 국회의장, 우상호 대통령실 정무수석, 여야 원내대표를 비롯한 정치권 인사와 민주화운동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우 수석은 이재명 대통령의 기념사를 대독한 뒤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위해 국회와 협조하고, 법안이 관철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일상의 민주주의는 개인이나 정부가 끝없이 성찰하고 절제하고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며 마음의 습관으로 자리 잡는 것”이라며 “민주주의는 힘이 아니며 민주주의는 반대자들과도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시민단체 ‘남영동 대공분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사업회가 이 건물 6·7층을 사무실로 사용하는 것을 중단하고 기획전시관 등 시민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장했다.





이영근([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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