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보석거리 털려 난장판"…33년전 LA폭동 악몽 떠오른다 [르포]
10일(현지시간)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의 대표적 명소로 꼽히는 6번가 ‘보석 거리’ 곳곳에 유리 파편이 널부러져 있었다. 상점 문은 뜯겨져 나가 나무 판자로 막아놨고, 진열대는 텅 비었다. 난장판이 된 거리의 랜드마크 애플숍엔 ‘당분간 영업을 중단한다’는 안내문이 걸렸다.




보석거리의 상점 대부분은 이날 문을 닫았고, 점주들은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사설 경호원이 지키는 가운데 쇼윈도에 판자를 덧대고 있었다.
인근에 거주하는 찰리 시즌은 “밤새 오토바이 소음과 유리가 깨지는 소리로 한숨도 못 잤다”면서도 “보석가게, 마약상점들은 비슷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약탈 대상이 됐기 때문에 솔직히 별로 놀랍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신이 나간 약탈자들의 행동을 불합리한 이민 정책에 대응하는 시위대가 한 짓으로 보게 될까봐 오히려 걱정”이라고 했다.


닷새째를 맞은 대규모 시위 와중에 LA에서 대규모 약탈과 폭력 등의 범죄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시위대를 ‘짐승’에 비유하며 공격 수위를 더 높였다. 그는 이날 노스캐롤라이나주 육군 기지 포트 브래그에서 진행한 연설에서 “외국 국기를 든 폭도들이 우리나라를 침공하고 있다”며 “LA는 통제되지 않은 이민 때문에 썩어버린 오물 구덩이가 됐다”고 말했다.

논란이 되고 있는 군병력 투입에 대해서도 “내가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면 LA는 불바다가 됐을 것”이라며 “그들은 골칫덩이, 선동꾼, 반란자들에게 돈을 지불했고, 의도적으로 범죄자들이 도시를 점령하는 걸 돕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말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민주당 소속 주지사와 시장이 시위대를 고용했다고 주장했다는 해석이 나오자, 그는 “나는 ‘그들’이 돈을 줬다고 말한 적 없다”고 했다.
치안 불안과 함께 트럼프 대통령의 공세가 거세지자 이날 시위대는 그간 대치를 벌여온 연방 건물 앞 집회 대신 가두 행진을 거쳐 인근 공원에 모여 평화 집회를 열었다. 행진 중에는 “평화로운 시위”라는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의 마찰을 최소화했다.

캐런 배스 LA 시장도 이날 “전날밤 23개 사업장이 약탈당했다”며 “반달리즘(공공시설 파괴)과 약탈을 막기 위해 통행금지령을 발령한다”고 밝혔다. 오후 8시부터 오전 6시까지 통행이 금지되는 지역은 공공기관이 위치한 시내 1제곱마일(약 2.6㎢)이다.
통행금지령 발령 직후 개빈 뉴섬 주지사는 TV연설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주방위군을 장악하고 주방위군 4000명과 해병대 700명을 소집해 불타기 쉬운 상황을 부채질하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시위를 폭력적으로 변하도록 자극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캘리포니아가 첫 번째일지 몰라도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며 “다음은 다른 주들로 확대될 것이고, 그 이후는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 이뤄질 것”이라고 했다.

실제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날 시위는 LA를 비롯해 최소 24개 이상의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생일인 오는 14일 워싱턴에서 육군 창립 25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열리는 열병식을 계기로 시위가 보다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격해지는 시위와 진압 상황을 바라보는 LA 한인사회도 술렁였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장남 트럼프 주니어가 9일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1992년 발생한 ‘흑인 폭동’ 당시 스스로 싸울 수밖에 없었던 ‘루프탑 코리안’을 언급하면서 “트럼프 정부가 의도적으로 한인을 또다시 희생양을 삼으려 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반면 폭동 당시 한인 ‘자경단’을 구성하고 한인을 결집시킨 역할을 했던 김용호 남가주한인요식업연합회장은 “인종별 갈등이 있었던 33년 전과 정부의 이민정책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이번 시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며 “정치적으로 한인 사회를 희생양으로 만들려는 프레임에 넘어가지 않으면 폭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흑인폭동을 겪은 한인들은 30여년간 지역에서 여러 집단과 공존하는 구조를 만들어왔다”며 “폭동의 우려보다는 코리아타운 인구의 30% 이상을 차지하며 노동력을 제공하는 핵심 파트너가 된 라티노가 쫓겨날 경우 한인 경제의 근간이 흔들릴까 걱정”이라고 했다.
실제 LA에서 시작된 라티노에 대한 체포가 본격화된 이후 남부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1300여개의 한인 식당 중 상당수의 종업원들이 숨어버리면서 영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와 관련 이날 LA총영사관은 한인회를 비롯해 LA시장까지 참여한 화상 회의를 통해 대응책을 논의했다.

강태화([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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