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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엽의 문학으로 세상읽기] 검객은 정객인가 협객인가

성민엽 문학평론가
완성된 글을 다시 읽어가며 다듬어 고치는 일을 퇴고라고 합니다. ‘추’라고도 읽는 ‘퇴(推)’는 민다는 뜻이고 ‘고(敲)’는 두드린다는 뜻입니다. 이 고사성어는 9세기 중국의 시인 가도(賈島)가 “조숙지변수, 승퇴월하문(鳥宿池邊樹, 僧推月下門)”, 번역하면 “새는 연못가 나무에서 잠자고, 스님은 달빛 아래 문을 민다”라고 시를 지어놓고 두 번째 구의 두 번째 글자를 ‘퇴’로 하는 게 좋을지 ‘고’로 하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는 일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똑같은 칼 한 자루 들고 있지만
제 칼의 정당성 과신하면 정객
칼의 한계 알고 행동하면 협객
과대망상적인 확신 경계해야

김지윤 기자
미는 것과 두드리는 것 사이에는 제법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것은 집 안의 사람에게 열어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인 데 비해 미는 것은 스스로 여는 것입니다. 또 앞 구와 관련지으면 문을 두드릴 경우 그 소리로 인해 잠든 새가 깰 수도 있는 데 비해 밀 때는 밤의 고요함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전하는 말로는, 원래 스님이었던 가도가 퇴고의 고민을 하며 길을 가던 중에 당시의 문호이며 고관이었던 한유와 마주쳤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환속을 하고 관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크게 출세하지는 못했으며 가난한 삶을 면치 못했다고도 합니다. 그가 남긴 시 중에서 저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시는 ‘검객’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십년마일검, 상인미증시(十年磨一劍, 霜刃未曾試)/ 금일파시군, 수유불평사(今日把示君, 誰有不平事)”

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십년 동안 갈아온 검 한 자루, 서릿발 칼날 아직 시험도 않았노라/ 오늘 꺼내어 그대에게 보여주니, 불공평한 일 있는 자 누구인가”

예로부터 마지막 구는 지금 제 번역과는 다른 뜻으로 읽혀왔습니다. 이 구를 반어적 의문문으로 보고 “누가 불공평한 일을 하겠는가”라고 읽는 것입니다. 한문에서 수(誰)로 시작하는 문장이 반어적 의문문으로 되는 경우가 워낙 많기 때문에 한문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이 구절을 보자마자 저절로 그런 뜻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법만의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이 시의 표면적 진술은 검객 이야기지만 여기서 검은 ‘학문’을 비유한 것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비유는 당시의 문학적 관습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시인의 의도였을 수 있습니다. 『고문진보』에는 “물건을 빌려 비유한 것으로 몇 년 동안 학문을 하여 재능을 쌓고서 일단 군주를 얻게 되면 마땅히 조정을 위해 간사한 자들을 물리쳐야 한다”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의 숨은 뜻은 “십년 동안 학문을 연마한 나를 그대의 칼로 쓰라”는 자천(自薦)에 있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이 시는 권력의 이야기가 되는데, 저는 이 이야기에 반감을 느낍니다. “누가 불공평한 일을 하겠는가”라는 반문에는 내 칼이 두려워서 불공평이 다 사라질 것이라는, 나의 권력의 칼에 대한 과대망상적 확신이 들어 있는 것 아닐까요? 자천하는 자나 자천을 받는 자나 그 확신을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확신이 아니라면 자기기만이거나 가식이겠죠. 여기서 검객은 정객(政客)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의도가 반드시 그랬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시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 시를 정반대의 위치에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검객은 협객(俠客)입니다. 이 시를 협객의 눈으로 읽을 때 검은 검일 뿐이고, 마지막 구절은 반문이 아니라 실제적 의문문이 됩니다. “누가 불공평한 일을 했는지 알려다오, 내가 그를 베리라”가 됩니다.

이것은 나의 칼이 가진 한계를 알면서 하는 발언입니다. 수많은 불공평을 자신이 다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협객은 압니다. 협객은 권력이 아닙니다. 권력 밖에서, 제도 밖에서 스스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안들에 부딪쳐 갑니다. 하나씩 하나씩. 협객이 권력이 된다면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협객이 아닙니다.

이 협객은 현대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는 자경단이나 테러리스트로 보일 것입니다. 공권력에 도전하는 불온한 무리일 뿐이겠죠. 불공평한 일을 한 자보다 오히려 더 엄한 처벌을 받을 겁니다. 이런 의미의 협객이 오늘날 실제로 존재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소설이나 영화 같은 허구 속에서는 무수히 존재합니다. 이 존재는 무얼 말하는 걸까요?

한국의 무협소설 작가 좌백이 가도의 이 시를 인용하면서 마지막 구절을 저와 같은 방식으로 번역한 적이 있습니다. 멋진 의역이어서 여기에 소개합니다.

“십 년간 칼을 갈았네/보라, 이 서릿발 같은 칼날/ 그대에게 먼저 보여주는 것이니/말하라, 베어 마땅한 놈을”

성민엽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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