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이념 갈려 월북한 천재 김순남
그가 작곡한 ‘초혼’의 여운 짙어
북에서 행복 못 누렸을 자유인
그가 작곡한 ‘초혼’의 여운 짙어
북에서 행복 못 누렸을 자유인

이해가 가지 않는 대표적인 인간형 중에는 2차 대전 때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르고 30년을 동굴이나 정글에 숨어 산 일본군 패잔병, 그리고 학창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던, 나이 들어 암에 걸려서도 미 제국주의 의학에 의존할 수 없다며 병원 한번 안 가 병이 깊어져 죽은 지인이 생각난다. 그는 서재에 가득 찬 책들을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무척 인기 있는 철학 교수였던 그의 서재에 가득 꽂혀있던 책들은 표지만 칸트·헤겔·비트겐슈타인 등이었을 뿐 속은 다 민족주의 주체사상에 관한 책들이었다. 같은 생각에 심취했던 친구들은 정치에 입문해 나름 높은 직책을 맡는 동안 그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살다가 후회하며 이생을 떠났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로 잠 못 이룬 사이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다음 날 비 오는 저녁, 지인의 초대로 김순남 선생의 곡들과 따님이신 김세원 국민 성우의 시 낭송을 함께한 음악회 ‘가곡시대’로 향했다. 김순남, 한국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 작곡가. 그 이름은 내게는 굉장히 낯익은 이름이다. 1989년에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시던 멋쟁이 작곡가, 아마 아버지보다 다섯 살 정도 위였을 그분과 아버지는 어쩌면 요새 말로 브로맨스 사이였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작곡가와 출판인으로 처음 만나 사람들 사이에 같이 찍힌 사진 속 그들은 마치 형제처럼 잘생긴 모습이다. 주로 김소월의 시에 붙인 선생의 가곡들은 현대적이고 전위적으로 느껴졌다. 소련의 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동양에도 이런 천재가 있었느냐고 했다는, 김소월의 ‘초혼’에 곡을 붙인 김순남의 곡을 듣다가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는 대목에서 갑자기 목이 메었다. 선생이 작사 작곡한 자장가의 구절들이 나를 울렸다. “하늘에 기러기 찾아오는데 떠나간 아버지는 언제나 오나” “너 자라서 이 겨레의 햇빛이 되어 엄마의 이 눈물을 씻어주려무나.” 그에 딸은 “나는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아버지의 손을 잡아본 적도 없으며 아버지와 어딘가를 가본 적도 없다. 그러나 어느 딸이 아버지로부터 자장가 다섯 곡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답한다.
참말로 그럴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 수립되면서 과거 ‘인민 항쟁가’를 작곡한 이유로 체포령이 내려져 월북하는 길에 선생은 내 아버지를 찾으셨다 한다. 내 생각엔 그 외로운 길에 동행하고 싶었던 사람이 바로 우리 아버지다. 아마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선생도 아버지도 그 체제에서 단 한 순간도 행복할 수 없을 자유인들이었다. 길이 어긋나 아버지는 남았다. 같이 가셨더라면 나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인생은 우연의 조각들이 아니라 의미 있는 실타래다. 김세원 선생의 그 호소력 있는 목소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그 여운을 가슴에 담고 비 오는 거리로 나왔다. 비는 그쳤고, 나는 거리에 한동안 서 있었다.
황주리 화가·동국대 석좌교수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