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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영의 아는 그림] 누가 ‘우리 국민’일까? 보트 피플 작가의 질문

중앙일보

2025.06.17 08:04 2025.06.17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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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영 문화부 기자
1979년 네 살 난 얀 보는 베트남에서 가족과 함께 배에 올랐다. 아버지는 전쟁의 상흔이 여전한 고국을 탈출해 미국에 갈 요량이었다. 이들은 덴마크 상선에 구조됐고, 코펜하겐에 정착했다.

2011년 얀 보는 미국 공공미술기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뉴욕 리버티 아일랜드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실물 크기로 복제하기로 했다. 프랑스에서 제작해 1876년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선물로 보낸 조각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던 여신상을 그때 처음 본 그는, 조각이 생각보다 얇아서 놀랐다.

좌대를 빼고도 46m에 달하는 이 여신상의 복제품을 만드는 데 2년이 걸렸다. 상하이의 장인이 구리 조각을 얇게 두드려 펴 250여 부분으로 만들었다. 얀 보는 완성된 부분을 한데 모아 번쩍이는 구리 자유의 여신상을 세우는 대신 전 세계에 흩트려 놓았다. 제목은 ‘우리 국민은(We the people)’. 1787년 제정된 미국 헌법 서문의 첫 구절이다. 미국인들에게 정의, 보편적 복지, 자유를 약속하는 아름다운 문장들로 가득한 서문이다. 대학에서 유학생을 쫓아내고, 둘로 갈라져 대립하는 트럼프 시대 미 국민들의 모습을 보면 더없이 아이러니하게 읽힌다.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 현대미술 소장품전에 ‘우리 국민은’(부분·사진)이 나와 있다. 미니멀리즘 조각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작품은 여신상 옷주름의 한 부분이다. 얇고 조각난 파편은 자유나 민주주의가 얼마나 연약하고 불안정하며, 단절되고 분열돼 있는지 보여준다.





권근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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