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지하는 암호화폐 법안 3개가 17일(현지시간) 미 하원을 통과했다. 특히 스테이블 코인의 규제틀을 법제화하는 ‘지니어스 법안(Genius Act)’은 상하원에서 모두 통과돼 이르면 오는 18일 있을 트럼프 대통령의 서명만 남았다. 이로써 스테이블 코인으로 흔들리는 달러 패권을 공고히 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구상이 본격화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 하원은 이날 본회의를 열고 지니어스 법안을 찬성 308표 대 반대 122표로 가결했다. 법안은 스테이블 코인의 법정 정의, 발행 절차, 공시 의무 등을 규정했다. 스테이블 코인 사용 촉진을 위해 필요한 규제 틀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구체적으로 스테이블 코인 발행사가 미국의 자금세탁금지법과 제재법을 준수하도록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하면 미국 최초의 가상자산 관련 법안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스테이블 코인은 코인 가치를 달러나 원 같은 법정화폐나 실물자산에 연동해 발행하는 암호화폐다. 높은 가격 안정성이 특징이다. 구매 뒤 거래소에서 이를 현금화하는 몇 분 사이에도 가격이 급변하는 기존 암호화폐와 달리, 달러 가치에 연동돼 있어 변동폭이 작다. 달러 기반 스테이블 코인일 경우 ‘1달러=1코인’ 비율로 실제 화폐처럼 사용할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스테이블 코인 가격이 실제 화폐 가치와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려면 스테이블 코인 가격에 1대1로 상응하는 담보(준비금)를 실물 자산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1달러어치 코인을 발행하고 투자자가 이를 사면 발행자는 1달러나 그만큼의 가치를 지닌 국채를 사 준비금으로 갖고 있다가, 고객이 다시 달러로 바꿔 달라고 할 때 달러나 국채를 팔아 얻은 현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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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 수요 증가→재정적자 완화 노려
지니어스 법안의 핵심 내용은 이 스테이블 코인의 준비금을 달러와 미 단기 국채 등으로 100% 보유하는 걸 의무화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스테이블 코인을 많이 발행할수록 미 국채 수요가 늘어난다. 토르스텐 슬록 아폴로글로벌매니지먼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스테이블 코인이 성장하면서 (준비금인) 미 국채 수요는 수조 달러 규모로 증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채 수요가 증가하면 단기 국채 금리가 낮아져(국채 가격 상승) 미 정부의 재정적자와 지급할 이자도 줄어들 수 있다. 미국의 국가부채는 36조2100억 달러(약 4경 9737조원)로 매년 내는 이자비용만 1조 달러가 넘는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미국을 세계의 암호화폐 수도로 만들겠다”며 지니어스법 등을 통과시키는데 힘써온 이유다. 최근 중국과 러시아 등 신흥경제국 연합체 브릭스(BRICS)국가를 중심으로 미 국채 매입을 줄이면서 국채금리가 상승(국채 가격 하락)해 미국의 이자 부담이 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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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패권 공고화 포석도
달러 가치에 연동되는 스테이블 코인의 활성화는 달러 패권 지키기에도 도움이 된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지난 5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1분기부터 2024년 2분기까지 달러 연동 스테이블 코인 거래의 90% 가량이 미국 외에서 발생했다. 미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은 “미국은 지니어스 법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달러 우위를 확보하려 한다”며 “정치적 개입 없이 달러의 영향력을 확장하게 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지니어스 법안 외에도 하원에선 2건의 암호화폐 법안이 통과됐다. 암호화폐의 규제당국을 명확히 하는 ‘클래러티 법안’(Clarity Act)은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암호화폐 감독 권한을 줄이고,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통제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발행하는 것을 금지한 ‘반 CBDC(Anti-CBDC) 감시 국가 법안’도 통과됐다. 두 법안은 상원에서 논의 후 최종 가결 여부가 결정된다.
이번 법안 통과를 가상자산 업계 로비의 승리로 보는 평가도 나온다.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암호화폐 규제 리스크를 겪은 업계가 정치권 로비에 나서 트럼프 행정부와 공화당 주도의 입법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번 입법은 규제 리스크에 직면했던 가상자산 업계가 지난해 대선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얻어낸 결실”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주요 대형 은행도 스테이블 코인에 대해 기대감을 나타냈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최고경영자(CEO)는 “스테이블코인에 참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시티그룹의 제인 프레이저 CEO도 “지니어스법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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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트럼프 배불리는 일 막아야”
다만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재임 중 암호화폐 사업으로 사적 이익을 얻는 것을 막는 조항이 포함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법안에 반대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법안에는 의원 및 그 가족이 스테이블 코인으로 이익을 얻는 걸 금지했지만 대통령과 가족은 막지 않았다. 트럼프 일가가 소유한 암호화폐 기업 월드리버티파이낸셜(WLF)은 자체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이 기업의 암호화폐 판매를 통해 5735만 달러(약 799억원)를 벌었다.
이날 법안 통과로 비트코인 가격은 12만634달러에 거래되는 등 상승세를 보였다. 리플은 하루 전보다 12.6% 급등하며 역대 최고치(3.4달러)를 경신했고, 이더리움은 2.97% 올라 1월 이후 처음으로 3500달러 선을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