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헨리 키신저’로 불리는 지정학의 대가 로버트 카플란(73) 미국 외교정책연구소(FPRI) 석좌교수는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에서 보호받으며 중국의 성장을 발판으로 부(富)를 축적해온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카플란 석좌는 15일(현지시간)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현재 세계는 최강국 미국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 등 3개의 강대국이 동시에 쇠퇴하는 초유의 상황을 맞고 있다”며 이같이 진단했다. 이러한 정세 판단은 현재의 혼란 상황을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의 프레임으로 접근해온 기존의 시각과는 완전히 다르다. 한국의 대응 방식에 대해서도 다른 접근법을 제안했다.
카플란 석좌는 한국의 생존 전략을 묻자 “‘미·중 전쟁’의 승자를 예측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자체적 억지력을 키우는 방향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자체 핵무장’과 ‘통일 한국(Great Korea)’이란 말을 여러차례 반복했다.
“미·중·러 3대 강국의 ‘동시 쇠퇴’ 시대”
카플란 석좌와의 인터뷰는 화상통화로 진행됐다. 그는 30여분 진행한 인터뷰 시간을 아껴야 한다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서도, 자신의 발언 하나하나의 의미를 곱씹으며 단어 선택에서도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Q :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가속화하고 있다.
A : “패권경쟁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경쟁의 원인이 되는 지정학적 배경은 두개의 강대국 중 하나가 과거와 같은 압도적 패권을 행사하기 위한 단순한 경쟁 구도와 다르다. 미·중을 비롯해 러시아를 포함한 3대 강국이 동시에 쇠퇴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Q :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대국이다.
A : “미국은 여전히 강하다. 그러나 민주·공화 양 진영 모두 극단적 세력이 득세하면서 중도가 완전히 붕괴됐다. 중도 세력의 부재는 지금까지 제도적 민주주의 시스템이 더이상 작동하지 않을 거란 의미다. 이는 국내 정치뿐 아니라 국제적 무역과 외교 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 수십년간 세계 질서를 이끌어온 미국의 전통적 역할이 끝났다는 뜻이다.”
Q : 미국의 약화는 경쟁국인 중국에는 기회 아닌가.
A :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극단적 스탈린·레닌주의로의 회귀는 중국 공산주의의 마지막 단계다. 권력을 장악한 시 주석이 매우 강력해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역사 발전 단계 측면에선 공산주의 시스템의 종결을 의미한다. 시 주석 체제는 과거 수천 년간 무너졌던 중국 왕조처럼 결국 사라질 것이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4년 가까이 지속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극동에서의 영향력이 붕괴됐다. 과거 러시아 제국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트럼프 시대…“안미경중 시대는 끝났다”
카플란 석좌가 3대 강국의 동시 쇠퇴를 언급하며 한국의 ‘자강론’을 주문한 것은 글로벌 리더의 공백기에 생존하기 위해 한국이 스스로 ‘살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로 들렸다. 그는 실제 “트럼프 2기 들어 한국은 의지할 수 있는 여지가 크게 줄어든 미국과, 이념적 색채가 강해진 중국을 동시에 대면하고 있다”며 “특히 변덕스럽고 예측이 불가능한 트럼프 대통령 때문에 한국은 두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Q : 트럼프 2기의 급진적 변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A : “지금까지 중국은 협력적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하며 미국과 적당한 우호 관계를 유지해왔다. 미국은 이러한 기조 속에서 중국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한국 역시 미국의 안보 우산 속에서 중국의 성장을 활용해 부를 축적해왔다. 무역과 안보 분야의 급격한 변화는 ‘정상적’ 관계가 지배하던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한 의미로 봐야 한다.”
Q : 북한과 대치한 한국에게 미국은 유일한 동맹국이다.
A :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한국은 북한에 대한 자위 능력을 갖춰야 한다. 북한은 이미 60기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아주 빠르게 더 많은 핵무기를 갖게 될 것이다. 문제는 한국이다. 한국이 이미 보유한 기술력과 산업 기반을 고려한다면 자체 핵무장을 하는 일은 사실 기술적으로는 쉬운 일이다.”
현실적 한계에도…“韓 핵보유 선택 강요받을 것”
한국의 핵보유를 일종의 안보 패러다임 변화에 대한 한국의 자구책으로 제시한 그의 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한국은 트럼프 행정부 들어 사실상 핵보유를 강요받고 있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Q : 핵무장은 경제 및 안보의 부담 요인이고, 핵무장의 현실성은 떨어진다.
A : “동의한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남북 모두가 동시에 핵 보유국(nuclear power)이 된다면 당장 남북 관계부터 실질적인 긴장감이 확대될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과 그가 초래하고 있는 불확실성은 결국 한국에게 (자체 핵보유에 대한) 선택의 여지를 없애는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자체 핵무장은 극도로 민감한 사안이다. 핵비확산조약(NPT) 탈퇴 등 사실상 불가능한 조건을 안고 있다. 동시에 한국이 국제적 제재를 감수하고 핵을 보유할 경우 ‘대만 해협’ 문제 등 잠재적 화약고가 된 아시아의 ‘핵 도미노’로 이어질 수도 있다.
카플란 석좌는 한국의 핵무장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한국이 이미 (핵무장) ‘논의(discussion) 단계’에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며 구체적 계획이 실행되고 있을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Q : 통일 논의와 핵무장은 상충될 수 있다.
A : “통일을 위한 전제는 한국이 계속 번영하며 더 강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트럼프의 의도대로라면 한국의 한반도 통제력은 급속하게 약화될 것이다. 북한은 더 많은 핵무기를 확보하는 반면, 한국은 미국에 대한 의존을 낮출 수밖에 없다. 한국이 통일을 장기적 목표로 삼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핵무장의 필요성을 언급한 건 한국이 설정한 목표와 관련이 있다.”
“통일 가능성 ‘희박’…유일한 대안은 자강”
카플란 석좌는 “통일 한국 시대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도 “통일의 가능성이 희박해졌다”는 평가를 내렸다.
Q : 통일이 실현 가능한 목표라고 보는가.
A : “김정은의 최근 발언은 통일의 가능성이 더 낮아졌음을 시사한다. 핵무기도 정권 유지를 위한 수단이다. 그나마 현실성 있는 통일 시나리오는 김정은 정권이 쿠데타 등으로 불안정해지는 경우다. 북한이 급격하게 통치 불가 상황이 돼야 서울을 수도로 한 통일한국(Great Korea)을 기대할 수 있다. 비현실적이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통일의 실현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있다.”
Q : 트럼프의 대북 대화 재개에 대한 전망은.
A : “분명히 김정은과의 대화를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성과를 기대하지 않는다. 1기 때 했던 김정은과의 대화를 비롯해 최근 푸틴과의 대화를 통해 트럼프식의 회담은 성과와 무관한 ‘사진 촬영용’이란 것이 확인됐다. 회담이 성과를 내기 위해선 양측이 양보와 실익을 나눌 수 있는 비례성의 원칙이 전제돼야 하는데, 트럼프는 이러한 측면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다.”
“李 대통령, 침착한 저자세 필요…중도 살펴야”
카플란 석좌는 지난달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보인 이 대통령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혼란의 시기인만큼 이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보였던 ‘저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현명한 대처 방안”이라고 조언했다.
Q : 트럼프를 상대하는 이 대통령에게 해줄 조언이 있다면.
A : “지금과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저자세로 임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통령의 성격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소리를 지르고 고함을 치는 지도자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이 대통령이 보였던 태도는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
Q : 이 대통령은 한국인 근로자 구금 사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A : “이 대통령의 고민을 이해하고, 그가 보이고 있는 침착한 대응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이 대통령의 대응은 정치적으로 중도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할 말을 하면서도 선을 지키는 방식의 대응은 특히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하는 데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Q : 일각에선 트럼프 집권 시기만 버티면 된다는 의견도 있다.
A : “트럼프가 만든 기류가 영원히 새로운 표준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건 트럼프 이후 JD밴스가 집권한다면 트럼프 때에 비해 예측 가능성은 다소 높아지더라도 고립주의와 중국에 초점을 맞춘 외교 정책의 방향성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행동적 광기’가 제거된 트럼프 시대가 될 가능성이 있다. 중도를 지향하는 민주당 후보가 당선될 수도 있지만, 가능성은 50% 미만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통령은 이러한 미래 지형을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로버트 카플란은?
로버트 카플란(73) 미국 외교정책연구소(FPRI) 석좌교수는 전 세계 석학 가운데 지정학에 가장 정통한 인물로 꼽힌다. 워싱턴 포스트,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유수의 언론을 통해 글로벌 차원의 혜안을 전하며 ‘키신저를 잇는 글로벌 차원의 21세기 지정학자’로 불린다.
종군 기자로 이란ㆍ이라크 전쟁 등 국제 분쟁을 취재하면서 특유의 필체와 통찰력으로 분석해온 저널리스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다. ‘포린폴리시’에서 선정한 세계를 움직이는 ‘100대 사상가’에 두 차례 오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