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5번 프리웨이를 타고 북쪽으로 30분가량 달리면 LPGA 투어 기아 클래식이 열렸던 아비아라 골프장이 나타난다. 팔로마 에어포트 로드로 빠져나가 몇 분 더 들어가면 ‘골프의 실리콘밸리’ 칼스배드다.
야자수가 우거진 캘러웨이 본사에서 만난 한국인 정하중 매니저는 “골프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지만 혁신은 이 곳에서 생긴다. 칼스배드 없이는 현대 골프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캘러웨이가 1980년대 초 본사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골프 산업 클러스터가 생겼다. 칼스배드 상공회의소 브렛 산첸바흐 CEO는 “골프 회사라면 겨울이 추운 일리노이가 아니라 연중 골프가 가능한 캘리포니아를 택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당시 이 지역은 부동산 비용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이후 타이틀리스트, 테일러메이드, 코브라·푸마 등 주요 업체들이 속속 들어오며 산업 생태계가 형성됐다. 온화한 기후와 바닷바람 덕분에 실외 테스트·연습 환경이 뛰어나고, 공항과 항만이 가까워 주로 아시아에 있는 공장과 부품 공급망 접근성도 좋다.
인근에 항공우주·첨단소재 기업이 많아 엔지니어와 신소재 기술 확보도 쉽다. 현재 샤프트·시뮬레이터·액세서리 등 110여개의 골프 관련 회사가 모여 시너지를 낸다. 헤드 소재로 쓰인 티타늄 때문에 ‘티타늄 밸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캘러웨이를 중심으로 코브라·푸마는 차로 2분, 테일러메이드는 3분, 타이틀리스트는 5분 거리에 있다. 타이틀리스트는 본사와 볼 연구센터를 메사추세츠에 두면서도 클럽 R&D·퍼포먼스 센터를 칼스배드에 운영한다. 이 밖에도 아디다스골프, 혼마, 오지오, 후지쿠라, 아딜라, 미츠비시, KBS, 트루템퍼, 풀스윙, 베셀 등 주요 업체들이 즐비하다.
캘러웨이 건물엔 마케팅 등을 주도하는 본사와 첨단장비들로 채워진 R&D 시설 등이 있다. 정하중 매니저는 “캘러웨이는 경쟁사보다 R&D 예산과 인력이 많다. 훨씬 다양한 제품을 만들고 AI 등으로 혁신을 시도한다. 굳이 이 정도까지 해야하나 생각될 정도로 검수과정도 매우 치밀하다”라고 했다.
보안을 요하는 첨단장비가 많아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곳도 많았다. 퍼팅 관련 연구소와 장비도 많았다. 이 회사 홍보담당 제프 뉴튼은 “캘러웨이 오디세이가 투어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퍼터인데 이는 R&D 에 들이는 열정과 다양한 퍼터 종류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기자가 방문한 2월 초 인근 샌디에이고에서 제네시스 인비테이셔널이 열렸고 PGA 투어 선수들이 대거 골프 실리콘 밸리를 방문해 용품을 테스트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손녀인 골프 선수 카이 트럼프는 테일러메이드에서 피팅을 받고 있었다.
빅3 회사 모두 최첨단 드라이빙 레인지를 갖추고 있다. 캘러웨이는 칼스배드 입구에 창업자 이름을 딴 일리 캘러웨이 퍼포먼스 센터를 운영한다. 타이틀리스트는 인근 오션사이드에 ‘타이틀리스트 퍼포먼스 인스티튜트(TPI)’, 테일러메이드는 아비아라 골프클럽 내 ‘테일러메이드 아비아라 퍼포먼스 센터’를 운영한다.
세계 최고 회사들의 플래그십 피팅 시설이니 세계 최고로 만들었다. 첨단 분석장비를 활용한 피팅 시설 이외에도 300야드가 넘는 레인지, 전 세계 잔디와 모래를 갖춘 방대한 쇼트게임 구역을 자랑한다.
칼스배드에서 15분 거리에는 퍼터 명장 스코티 캐머런의 작업장과 전시장이 있다. 투어 프로·고객 피팅과 연구·커스텀 숍이 함께 운영된다. 한정품을 전시, 판매하는 캐머런 골프 갤러리에는 일본인과 한국인도 자주 눈에 띄었다.
이처럼 좁은 마을에 업체들이 빽빽이 붙어 있어 교류가 활발하다. 경쟁사지만 아이들이 같은 학교에 다니고, 식당과 술집에서 만나기도 한다. 밀라노에서 패션업체들이 유행을 만들어내듯, 칼스배드의 골프용품사들은 정보를 교환하며 이듬해 골프 트렌드를 만든다. ‘칼스배드 카르텔’에 끼지 못하면 소외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물론 경쟁도 치열하다. 테일러메이드에서 잔뼈가 굵은 마크 킹은 1998년 캘러웨이 골프공 사업 부사장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테일러메이드 사장으로 다시 스카우트됐다. 캘러웨이는 영업비밀 유출과 경쟁 제한 위반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고, 당시 테일러메이드에는 “마크 킹을 돌려달라”는 플래카드가 붙기도 했다. 양측은 결국 합의로 분쟁을 마무리했지만 앙금은 남아 있다.
직원들은 자부심이 강하다. 캘러웨이 제프 뉴튼은 “코로나 이전까지 업체 간 골프 대회를 했는데 캘러웨이가 항상 우승했다. 제품이 좋기 때문 아닐까”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