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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EC '경주선언' 채택했지만…자유무역 질서 지지 빠졌다

중앙일보

2025.11.01 00:23 2025.11.01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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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의장국을 맡은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가 1일 “공급망의 역내 및 글로벌 연계성 강화” 등을 담은 ‘에이펙 정상 경주 선언’을 채택하며 마무리 됐다. 미국 중심의 보호무역 기조 심화로 인해 기존 에이펙 선언문에 들어 있던 자유무역 질서에 대한 지지 문구는 빠졌지만, 진통 끝에 합의문을 이끌어낸 것 자체가 ‘선방’한 것이란 평가도 있다.



"견고한 무역·투자 필수적"…자유무역·WTO 지지는 빠져

이재명 대통령이 1일 경북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공식 기념촬영 행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등 각국 정상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시스
이날 대통령실과 외교부에 따르면 제32차 경주 에이펙 정상회의의 결과물인 경주선언에는 “견고한 무역 및 투자(robust trade and investment)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성장과 번영에 필수적이라는 공동 인식을 재확인”하고, “모두에게 회복력을 촉진하고 혜택을 제공하는 무역 및 투자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에이펙 정상회의 선언문은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21개 회원들의 전원 동의(컨센서스) 방식으로 채택한다.

경주선언에는 최근 글로벌 보호 무역 기조 등을 반영, “글로벌 무역 체제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음을 인식”하고 “변화하는 글로벌 환경을 헤쳐나가기 위해 경제 협력을 계속해서 심화시켜 나가기로 한다”는 대목이 담겼다. 또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반에서 글로벌 가치 사슬의 핵심 요소로서 회복력 있는 공급망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을 지지”한다는 것과 “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지대(FTAAP) 의제에 대한 논의를 포함해 시장 주도적인 방식으로 지역의 경제 통합을 추진”하자는 문안도 포함됐다.

이번 선언문은 지난해 페루 에이펙 정상회의의 ‘마추픽추 선언’과 비교했을 땐 자유무역 질서에 관한 한 후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유 무역 내지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옹호에 관한 내용이 아예 빠졌기 때문이다. 지난해엔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공정하며(a free, open, fair)…포괄적이며 예측 가능한 무역 및 투자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WTO를 중심으로 규칙 기반 다자 간 무역 체제(rules-based multilateral trading system)에 대한 지지(support)”를 표명하는 내용이 있었다.

대신 WTO 체제와 관련한 표현은 이날 함께 타결된 ‘외교통상 합동각료 회의(AMM)’ 공동성명에 들어갔다. AMM 공동성명에는 “우리는 무역 현안을 진전시키는 데 있어 WTO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며 “우리는 WTO에서 합의된 규범이 글로벌 무역 촉진의 핵심임을 인식한다”는 문안이 담겼다. 이와 함께 “WTO가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다”며 "포괄적인 개혁”의 필요성도 언급됐다.

정상급 문서인 경주선언에는 WTO 관련 표현이 빠졌지만 장관급 회의인 AMM 공동성명에는 이를 반영한 것이다. 이와 함께 경주선언에는 “외교통상합동각료회의의 성과를 향후 협력을 위한 중요한 기반으로 높이 평가한다”는 문구가 담겼다. 즉, 정상급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한 WTO 문제를 장관급 성명에 포함시키고, 이를 “협력의 기반으로 평가한다”는 문안으로 연결시킨 셈이다.



자정 넘겨 밤샘 협상…폐막 5시간 전 극적 타결

이재명 대통령이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폐막일인 1일 오후 경북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 인근 국제미디어센터(IMC)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밤샘 협상 끝에 경주선언과 AMM 공동성명이 동시에 타결된 것 또한 두 문서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한다. 외교부에 따르면 정부 주도로 21개 회원들이 지난달 31일 자정부터 마라톤 실무 협의를 벌인 끝에 이날 오전 7시 30분쯤 경주선언과 AMM 공동성명 합의문이 도출됐다. 폐막(1일 낮 12시)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극적으로 타결된 셈이다. 정상들은 이날 오전 두 번째 세션을 열어 11시 55분쯤 경주선언을 채택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새벽까지 수차례 고비를 넘긴 끝에 문안 협상이 마무리 됐다”며 “2025년의 성과와 APEC의 향후 방향성에 대한 회원국 간 다양한 의견이 컨센서스로 조율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의장국의 리더십과 밤새 자리를 지킨 회원 대표단의 공동 노력으로 결실을 맺었다”라고 말했다.

글로벌 관세 전쟁 등으로 보호 무역 기조가 심화하는 가운데 합의문을 도출한 것 자체로 의의가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 트럼프 1기 때인 2018년 파푸아뉴기니 에이펙 정상회의 땐 미·중 무역 갈등의 여파로 정상 간 합의문 도출에 실패했다.

이와 관련,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폐막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가장 큰 쟁점은 무역과 투자에 관한 챕터를 둘 거냐였다”고 밝혔다. 에이펙 자체가 역내 무역과 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협의체인데, 관련 내용을 담지 않은 선언문까지 고려할 정도로 의견 차이가 컸다는 뜻으로 들렸다. 이는 결국 미·중이 한 발씩 양보해 문안을 타결했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결과적으로 합의문을 도출한 건 의장국인 한국의 역량을 확인한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진통 끝 극적 합의’는 에이펙 정상회의 개막 직전 경주에서 열렸던 미·중 정상회담(30일)에서 양국 정상이 관세 전쟁의 휴전 합의를 했던 영향도 미쳤을 수 있다.



향후 에이펙서 AI·인구 변화도 논의키로

한편 경주선언에는 '문화창조산업' 분야 협력도 들어갔는데, 이는 에이펙 정상급 문서 중에선 처음으로 명시된 것이라고 정부는 설명했다. “문화창조산업(CCIs)이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영향을 인식”하며 “APEC 회원간 문화창조산업에 관한 대화와 협력이 역내 경제 성장에 기여할 것임을 주목한다“는 내용이다.

이번 에이펙 정상회의에선 경주선언과 별도의 ‘에이펙 AI(인공지능) 이니셔티브’와 ‘APEC 인구구조 변화 대응 프레임워크’도 채택됐다. 대통령실은 “에이펙 최초로 AI, 인구 변화 대응과 관련한 합의를 도출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유정.박현주([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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