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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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최초로 좌파 정권을 세운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이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껄끄러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최근 남미 아르헨티나·엘살바도르·에콰도르·볼리비아 등에 친미 우파 정권이 들어서며 ‘블루 타이드(blue tied·우파 물결)’가 두드러지는 것과는 반대되는 움직임이다.
페트로 대통령은 12일(현지시간) 미국이 카리브해에서 벌이고 있는 마약 밀매 선박 단속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미국과의 모든 정보 공유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페트로 대통령은 자신의 X(옛 트위터)를 통해 “미국 안보기관과의 통신·기타 협력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마약과의 전쟁은 카리브해 지역 주민들의 인권보다 우선시 될 수 없다”면서다.
콜롬비아는 최근까지 남미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우방국이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남미에 온건 사회주의를 표명하는 좌파 정권이 들어서 ‘핑크 타이드(pink tied·좌파 물결)’가 확산 됐을 때도 콜롬비아는 중도우파 보수 정권이 집권하며 친미 노선을 지향했다. 세계 최대 코카인 생산국이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아 코카인 생산·유통 차단과 마약 밀매 카르텔 억제에도 힘써왔다. 국제위기그룹(ICG)에 따르면 미국이 카리브해에서 마약을 압수하는 데 활용하는 정보의 약 80%는 콜롬비아 정부에서 나온다.
양국 관계는 올해 1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며 빠르게 냉각됐다. 미국에 불법 체류하던 콜롬비아 국적자들을 태운 항공기 2대의 착륙을 콜롬비아가 거부하자 트럼프 대통령이 고율의 관세 및 여행 금지 조치 등을 취하겠고 경고하면서다. 9월에는 미 국무부가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페트로 대통령이 친팔레스타인 집회에 참석한 것이‘선동 행위’라며 그의 비자를 취소했다. 페트로 대통령은 당시 집회에서 미군 병사들에게 “트럼프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하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최근 ‘마약 퇴치’를 명분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축출을 밀어붙이고 있는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이어 페트로 대통령이 다음 타깃이 될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베네수엘라 마약밀매 조직을 ‘테러 단체’로 지정하고 마두로가 수장이라고 주장하며 지난 11일 제럴드 포드 항공모함 등을 베네수엘라 인근 해역에 배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19일 트루스소셜에 “페트로는 불법 마약 수장으로서 대규모든 소규모든 콜롬비아 전역에서의 마약 생산을 강하게 장려하고 있다”며 콜롬비아에 대한 마약 밀매 퇴치 예산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페트로는 트럼프 대통령이 싫어하는 친중 행보까지 대놓고 벌이는 중이다. 그는 지난 5월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역점 대외사업인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 참여를 선언했다. 콜롬비아는 중국이 주도하는 신흥경제국 연합체인 브릭스(BRICS) 가입도 추진 중이다.
페트로 대통령이 트럼프 행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배경엔 내년 5월에 치러지는 콜롬비아 대선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980년대 좌파 무장조직(게릴라) 출신인 그는 세 번째 대선 도전 끝에 2022년 8월 콜롬비아 역사상 첫 좌파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재선 및 연임을 허용하지 않는 콜롬비아 헌법상 페트로 대통령은 내년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 그러나 지지층을 결집하고 내년 대선까지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미 행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게다가 남미에선 2023년 말 아르헨티나에서 급진 우파성향의 하비에르 밀레이 정권이 출범한 이후 지난해 6월 엘살바도르, 올해 5월 에콰도르, 지난달 볼리비아에서도 좌파 정부가 보수 우파정권으로 교체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반트럼프 전선으로 좌파 정권을 수성하려는 것이 페트로 대통령의 생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이처럼 공개적으로 맞선 지도자는 드물다”며 “페트로 대통령은 1990년대 제도권 정치에 입문한 뒤에도 우익 민병대와 정치인들의 유착을 폭로하며 명성을 얻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콜롬비아 내에선 페트로 대통령의 대외 정책이 실용주의보다 이념에 치우쳐져 있다는 불만도 제기된다고 NYT는 지적했다. 지난해 콜롬비아의 대미 수출 비중이 전체에서 30%를 차지한 만큼 미국과의 갈등은 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