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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씨 집안 족보엔 이름 수천명…내 뿌리가 궁금해졌다 [왕겅우 회고록 (24)]

중앙일보

2025.11.29 13:00 2025.11.29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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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 / Roots

내 뿌리를 찾아 나서는 날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집안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고 머리가 굳어지기 전에 타이저우, 난징과 상하이를 가본 나는 더 찾으러 나설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말씀해준 내용조차 잊어버린 것이 많고 흐릿해졌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다.

아내 마거릿이 자기 어머니 계실 때 여쭤보지 못했던 것이 얼마나 아쉬운지 말할 때, 왕씨 집안의 전기를 다시 읽어볼 생각이 들었다. 여러 해 전 몇 분의 전기를 읽은 일이 있는데, 족보를 보지 못한 것이 아쉽던 생각이 난다. 그 전기들 사이에 틈새가 많이 있었던 것은 전기를 작성한 종증조부님이 기록할 가치가 있는 경력의 조상들만 뽑아서 작성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타이저우 시립도서관에서 그분이 작성한 족보 원고를 발견하고, 수천 명 이름이 실린 것을 보며 얼마나 큰 가문인지 놀랐었다.

우리 조상들은 칭위안(清源) 현의 농민이었다. 지금은 산시(陝西)성 성도 타이위안(太原) 시의 칭쉬(清徐) 현에 합쳐진 곳이다. 명나라 개국 무렵인 1369년 두 형제가 군에 징발되었다. 하나는 동쪽 이웃 성인 허베이(河北)의 정딩(正定)에서 복무했고, 또 하나는 저쟝성 닝보(寧波) 부근의 관하이웨이(觀海衛)에서 복무했다. 왜구에 대비하는 방어기지였다.

우리 북쪽 지파는 닝보의 남쪽 지파와 연락이 끊겼었는데 16세기 말에 남방의 장군 왕상원(王尚文)이 정딩 지파를 찾아왔다. 얼마 동안 두 지파 사이에 연락이 있다가 다시 끊어졌다. 관하이 쪽 지방사 연구를 통해 그곳 무관 집안이 실제로 정딩에서 유래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 집안은 19세기에 사업에 나서서 큰 재산을 모았으나 1949년 공산당 집권 후 몰락했다. 2014년 그곳을 방문했을 때 그 저택을 보니 한때의 영화를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 집 유래에서도 군대가 농민에게 계급 이동의 기회를 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닝보 지파는 여러 대 무관을 지내다가 19세기에, 특히 닝보와 상하이의 개항 이후 사업가로 성공을 거뒀다. 북쪽 우리 지파에게는 그런 모험이 없었다. 과거에 몇이 합격해서 향신(鄕紳) 계층에 편입했다. 신분 상승의 기회를 누리지 못한 사람들은 군인으로 지내거나 농민이 되었다.

정딩의 먼 친척들이 만든 최신판 왕씨 족보가 나왔다. 전에 그들을 만났을 때 19세기에 쟝수성으로 갈라져 나온 분파와 그중 해외로 나간 사람들 이야기를 했더니 반가워했다. 그 이야기를 적어 놓더니 새 족보에 넣었다. 왕우천(王武臣) 등이 엮은 〈정딩 왕씨 족보〉는 2016년 12월에 나왔다. 19세기까지 족보 내용 대부분은 타이저우 시립도서관에 있는 원고와 같다.

이 새 족보를 보고 지파 종가의 사당이 산리툰(三里屯) 마을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는데 문화혁명 때 농지로 바뀌었다. 동문(東門) 쪽 대로에 서 있던 가문의 파이팡(牌坊)도 그 무렵에 철거되었다.

왕씨는 너무 흔한 성이라서 여러 왕씨 가문 사이의 관계를 확실히 알기 어렵다. 정딩현 안에서만도 그렇다. 예를 들어 위안스카이 휘하의 장군으로 북양정부 총리를 지낸 왕스전(王士珍, 1861–1930)은 정딩 부근 조그만 마을의 농가 출신인데 어쩌다 동문(東門) 종가의 보호와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는 군인이 되어 1880년대 조선에서 전공을 세우고 군사훈련 책임자가 되었다가 청나라의 최고급 장군으로 올라갔다. 군벌의 졸개 노릇을 한 이력과 상관없이 고향에서는 출세한 인물로 추앙받는다. 근래에는 그의 학문적 면모도 조명받고 그가 지은 큰 저택도 복원되었다. 동문 종가에서 자란 사람이기 때문에 족보 편찬자들도 혹시 먼 친척이 아닐까 의문을 품었지만 결국 우리 지파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초기의 정딩 지파가 번영을 누리는 가운데 한 분파는 16세기에 첫 진사(進士)를 배출하여 신분의 장벽을 뚫고 진신(縉紳) 계층에 합류했다. 그 분파가 성내의 동문(東門) 구역에 자리 잡고 종가가 되었다. 명나라 시대에 번영을 누리던 왕씨 집안은 청나라 초기에는 잠잠하게 지냈다. 18세기 들어 다시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기 시작해서 19세기 중엽까지 명망을 누렸다. 왕딩주(王定柱, 1761–1830) 같은 인물은 윈난(雲南)과 쓰촨(四川, 그리고 저쟝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그 아들들이 나중에 쟝수에서 관직을 지냈고 손자 둘은 아주 자리 잡았다.

내 고조부인 왕인후(王蔭祜, 1824–75)와 그 형님 왕인푸(王蔭福, 1822–81)였다. 그분들은 참혹한 태평천국의 난(1851-64)이 끝난 후 타이저우로 옮겨왔다. 북경조약(1860) 직후, 청나라의 곤경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그때부터 우리 집안을 “타이저우 왕씨”로 부를 수도 있었는데, 타이저우에는 더 오래된 왕씨 집안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명나라 때 사상가이자 개혁가였던 왕간(王艮)의 자손들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북쪽의 정딩 지파 소속으로 통했다.

1983년에 가문의 출신지를 찾아 정딩에 갔을 때 그곳 왕씨 집안의 가장 왕우슝(王武雄)을 만났다. 같은 돌림자를 쓰는 먼 종형제 사이였다. 우리 분파는 20세기 중엽까지 타이저우에서 지냈으나 그 후의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전국으로 흩어지고 남은 사람이 적었다.

왕인후의 큰아들 왕겅신(王耕心)은 내 증조부의 형님으로, 많은 문장을 남겼다. 그분이 정리한 족보 원고가 남아있다. 타이저우 시립도서관에서 2014년에 복사를 해주었다. 인쇄할 뜻으로 그 족보를 작성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자식 대까지 넣도록 업데이팅을 했으나 1900년대 초 돌아가실 때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전기집 〈정딩 왕씨 가전(家傳)〉은 완성되어 1893년에 출판되었다. 문중의 집집마다 한 권씩 돌렸다. 말라야에 있을 때 아버지가 보여주신 일이 있다. 이사할 때마다 가지고 다니셨고 돌아가신 후에는 내가 가지고 있다. 정딩의 집안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도 가지고 있는 것이 반가웠다. 모든 족보를 버리라고 하던 문화혁명 시기에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과 일본, 유럽과 미국의 여러 도서관에도 갖춰져 있다.

어머니 말씀대로 왕씨 집안사람들은 매우 보수적이어서 19세기 중국의 쇠퇴기에도 청 왕조에 충성을 지켰다.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시던 왕레이샤 종조부님은 난징의 몇 개 교육기관을 담당했고, 그중에는 만주족 귀족 자제의 학교도 있었다. 그분 아들은 헌정실진회(憲政實進會) 회원이었는데, 고급 관료들이 조직하고 몇몇 만주족 황족의 지원을 받은 단체였다. 가문의 전기집에는 왕조의 종말이나 진신 계급의 소멸을 내다본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우리 집안은 여러 면에서 체제 변화의 정치적 과정에 직접 관계되지 않은 사람들의 전형적 모습을 보였다. 예컨대 서양 열강이 대청제국을 굴복시키고 중국 내부로 침투해 들어오는 현실에 관한 토론에 참가한 흔적이 없다. 왕겅신 세대와 다음 세대(내 할아버지 포함) 왕씨들은 유교 학술에만 전념하며 교육자로 활동했다.

그중에는 공직 은퇴 후 불교 중흥 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다. 펑라이샹(蓬莱巷)의 원래 본가는 평신도 사찰이 되었다. 정딩에 처음 찾아갔을 때 종가 사람들이 북중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사찰의 하나인 융흥사(隆興寺)와 같은 길에서 살고 있었다. 내가 만난 왕씨들은 그 가문이 늘 그 절의 시주를 해왔다고 확인해주었다.

왕딩주 이하 3대에 걸친 왕씨들의 출판된 글이 남아있지만 아주 적고, 시무(時務)에 관한 글은 전혀 없다. 타이저우 도서관에 약간의 수고(手稿)도 남아있다. 그러나 1947년에 갔을 때 이런 통상적 저술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일이 없다. 민족주의 운동에도 참여하지 않고 공산주의를 지지한 흔적도 없다. 할아버지가 쑨원에 대해 유교 전통의 파괴라는 측면에서 반감을 가졌던 것 아닌가 하는 어머니 의견이 있었다. 그 말씀이 옳다면 근대화 사상에 대한 우리 가문의 보수적 입장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할머니는 중일전쟁 중에 돌아가셨다. 1936년 처음 뵐 때의 인자한 모습이 생각난다. 타이저우의 첸씨 집안 출신이었는데, 둥타이의 외가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항구도시 전쟝에서 옮겨온 집안이었다. 할머니의 친정아버님 첸팅줘(陳廷焯, 1853–92)가 쓰신 사(詞) 평론서는 돌아가신 후 1894년에 출판되었다. 그 책은 사 연구의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았으나 내가 만난 왕씨 중에는 시문과 문학에 관심을 보인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가 집안 분위기와 다르신 까닭이 의아했는데, 이 책을 보니 아버지의 문학 사랑이 당신 외조부님을 흠모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김기협([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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