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개막해 5일까지 부산에서 열리는 세계도핑방지기구(WADA) 총회에 손을 대기도 떼기도 힘든 ‘핫 이슈’가 있다. 이른바 ‘스테로이드 올림픽’으로 불리는 ‘인핸스드 게임(Enhanced Games)’이다. 공정 경쟁을 스포츠의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WADA와는 대척점에 있는 이 ‘이단’은 효율과 기록을 신봉한다.
인핸스드 게임은 기록 경신을 위한 약물 복용 및 각 경기단체가 사용 불허한 첨단 장비 사용을 허용한다. WADA가 지키는 스포츠 윤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대회다. ‘과학 발전과 엘리트 스포츠의 결합’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내년 5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수영·육상·역도 등의 종목을 중심으로 대회를 개최한다. 종목별 우승자에게는 최대 25만 달러(3억6600만원)의 상금을 지급한다. 특히 세계신기록을 수립할 경우 최대 100만 달러(약 14억원)의 보너스를 주기로 했다. 수영의 벤 프라우드(영국), 육상 단거리의 프레드 컬리(미국) 등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 두 선수 모두 해당 종목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던 톱 클래스 선수다.
인핸스드 게임이 주목받는 이유는 또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들인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 테크기업 팔란티어의 공동창업자 피터 틸, 사우디아라비아의 빈 알왈리드 빈탈랄 왕자 등이 이 대회의 투자자 또는 후원자로 나섰다. 과거 도핑은 동유럽 국가나 러시아 등에서 불거진 문제였는데, 이번에는 미국이 아예 ‘스테로이드 올림픽’의 주요 플랫폼이 되고 있다.
국제 스포츠계는 인핸스드 게임 개최에 강력히 반발한다. 비톨드 반카 WADA 회장은 “도핑 장려는 생명을 위협하는 무책임하고 비윤리적 행위”라며 대회를 개최하려는 미국을 비난했다. 세계육상연맹(WA) 세바스찬 코 회장도 “말도 안 되는 대회이며 참가 선수는 바보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핸스드 게임 측은 지난 8월 “국제 스포츠기구가 불법적으로 독점행위를 한다”며 국제수영연맹(WA)과 WADA 등 상대로 8억 달러(약 1조1743억원) 규모의 소송 제기했다. 최근 소송 제기는 기각됐지만, 인핸스드 게임 측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지난달 26일에는 4000만 달러(약 588억원) 규모의 금융 거래를 통한 나스닥 상장 계획도 발표했다.
인핸스드 게임 측은 매년 대회를 개최해 스폰서십과 방송 수익을 얻을 뿐 아니라, 기록 향상에 도움을 주는 약품이나 기술을 활용해 다양한 사업을 펼친다는 구상이다. 나스닥 상장과 관련한 금융 거래를 통해 추산한 인핸스드 게임의 가치는 12억 달러(1조7640억원)이다. 투자금을 바탕으로 선수 영입 및 대회 홍보와 마케팅을 본격화할 전망이다.
6년 주기로 열리는 WADA 총회는 최대 규모의 반도핑 국제회의다. 이번 부산 총회에도 191개국 2000여명이 참석해 세계도핑방지규약, 국제표준 등을 논의한다. 5일 폐회식에서는 스포츠 공정성과 선수 보호, 도핑방지 국제협력 강화를 위한 공동 의지를 담은 ‘부산선언’을 발표한다. 반카 WADA 회장은 이날 개회식에서 “깨끗하고, 정직하며, 공정한 스포츠”를 거듭 강조하며 “위협이 교묘하고 강해져도 깨끗한 스포츠의 가치를 반드시 지킬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