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돌풍에 힘입어 최근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실적이 크게 개선되면서 산업 전반에 선순환 구조가 형성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런 흐름이 지속한다면 이공계 인재의 ‘의대 쏠림’ 현상도 완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경기도 용인 국가산업단지에 조성될 예정인 반도체 공장의 일부를 새만금 간척지 등지로 이전하자는 주장이 정치권·지방자치단체·학계를 중심으로 확산하는 양상이다. 이런 움직임이 다른 지역까지 번질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김성환 기후환경에너지부 장관의 모호한 언급까지 더해지며 우려가 크다.
선거 의식 정치권·지자체 주장
국가 핵심 산업 경쟁력 훼손 우려
정주여건 나쁘면 인재 빠져나가
이들은 재생에너지 사용을 강조하는 RE100과 지역균형발전을 주요 근거로 내세운다. 탈탄소 정책과 균형발전 필요성에는 공감대가 크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반도체 공장 이전 주장은 기술적·경제적 현실을 외면한 접근이라 우려스럽다. 자칫하면 국가 핵심 산업의 경쟁력을 스스로 약화시켜 이른바 ‘황금알 낳는 거위 배를 가르는 어리석음’이 될 수 있다.
반도체 산업은 막대한 법인세 납부와 수출을 통해 국가적 부가가치를 창출해왔다. 동시에 국민경제 전반을 지탱하는 핵심축이다. 나아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상존하는 현실에서 반도체 산업은 단순한 경제 자산을 넘어 국가안보를 떠받치는 ‘실리콘 방패’ 기능도 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유지 여부는 산업정책 차원을 넘어 국가 존망과 직결된 문제인 셈이다.
먼저 RE100 문제는 과도하게 확대 해석되고 있다. RE100은 2014년 영국의 비영리단체가 시작한 민간 캠페인으로 법적 구속력은 없다. 일부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참여하고 있지만, 재생에너지만을 엄격히 요구하는 기업은 애플 정도에 불과하다.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은 원자력을 포함한 탈탄소 전원 활용을 허용하고 있고, 엔비디아·브로드컴·AMD·퀄컴 등 주요 반도체 고객사 상당수는 RE100에 가입하지도 않았다. 메모리 반도체 경쟁사인 마이크론도 RE100 미가입 기업이다.
RE100을 요구하는 고객 물량은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충분히 감당 가능한 수준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RE100을 달성하지 못하면 2030년 반도체 수출이 30% 감소할 것’이라는 일부 전망도 과도한 가정에 기반한 추정치에 가깝다는 지적을 받는다.
재생에너지의 환경적 측면도 냉정한 검토가 필요하다. 태양광·풍력 설비는 이제 대규모 폐기물이 발생하는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재활용 기술은 아직 초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 폐기 과정 자체도 상당한 전력이 필요하다. 에너지저장장치(ESS)도 수명이 유한한 대용량 배터리 폐기 문제가 따른다. 재생에너지가 탈탄소 전환의 중요한 축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무조건 친환경으로 간주하는 접근에는 경계가 필요하다.
전력 수급 측면에서 보더라도 새만금 이전론은 비현실적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신규 반도체 공장 중에 3분의 1만 이전하더라도 약 5GW의 전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새만금 지역이 확보한 태양광 발전 설비 용량은 약 0.1GW에 불과하다. 국내 태양광 설비 이용률이 약 15.4%에 그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5GW의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해서는 총 32.5GW 규모의 태양광 설비를 새로 구축해야 한다.
여기엔 약 34조4000억원의 예산이 필요하고, 이미 매립된 새만금 토지(290㎢)의 약 97%(280㎢)를 필요로 한다. 풍력 발전 설비는 태양광보다 7배 이상 비용이 더 들어간다. 이런 여건을 종합하면 새만금 지역의 재생에너지만으로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게다가 글로벌 반도체 인재 확보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정주 여건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지역으로 우수 인력을 유치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물론 지역균형발전은 필요하지만, 국가 핵심 산업의 경쟁력을 훼손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반도체 경쟁력을 유지·강화하고, 그 성과를 정책과 재정을 통해 전국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균형발전의 길이다. 지금 세대가 후손들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스스로 포기한 나라’를 물려줄 수는 없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