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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의 시시각각] 양극화가 좌파 포퓰리즘 키웠다

중앙일보

2026.01.05 07:28 2026.01.05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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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 논설위원
“나는 국민 대다수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각하께서 탁월한 지도력으로 베네수엘라의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 각하의 과감한 개혁은 국내외적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 ‘각하’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다. 대통령 선거 승리로 1999년 취임한 차베스는 그해 중국·일본 등 아시아 순방길에 올랐고, 한국을 국빈 방문했다. 베네수엘라 국가 원수로서는 첫 방한이었다. 위에 인용한 김 대통령의 만찬사는 외교적 덕담 차원이었겠지만 차베스의 ‘개혁’이 훗날 나라를 거덜낸 좌파 포퓰리즘의 대명사가 될 것이라고는 당시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베스·마두로 27년 실험은 실패
심각한 양극화가 포퓰리즘 온상
확대재정 계속 땐 증세 계획 내야
지난 2010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남미국가연합(UNASUR) 회의에 참석한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당시 대통령(왼쪽)과 니콜라스 마두로 외무장관. AFP=연합뉴스

만찬사에는 차베스가 추진하던 제헌의회 구성과 신헌법 제정을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발전시키고, 베네수엘라의 21세기 비전을 창출하려는 역사적 과업”이라고 상찬하는 대목도 있다. 차베스의 개헌은 더불어민주당의 사법개혁과 맞물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자주 소환됐다. 상원을 없애고 대법관 숫자를 20명에서 32명으로 늘려 삼권분립을 무력화했던 바로 그 개헌이다. 그런데도 당시 국내 한 대학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공이 크다”며 차베스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한국에서 환대를 받은 차베스는 2006년에도 방한을 요청했지만 한국 정부가 한·미 동맹을 고려해 미국이 불편해 하는 차베스의 방한을 거부했다는 미국 외교 전문을 위키리크스가 공개했다.

‘21세기 사회주의’를 내건 차베스는 석유산업 국유화로 만든 오일 머니를 무상 의료·교육의 퍼주기 복지에 쏟아부었다. 한때 빈곤율이 줄어드는 성과가 있었다.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슬로건 아래 전 세계 좌파가 모이는 세계사회포럼(WSF)에서 주목을 받았다. KBS가 ‘신자유주의를 넘어서 차베스의 도전’이라는 균형 잃은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것도 그즈음인 2006년이었다.

미군 특수부대가 전격 체포해 미국으로 압송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차베스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버스노조를 이끌다 차베스 집권 후 정치에 입문해 국회의장과 외무장관을 역임하고 2012년 부통령이 됐다. 암 투병 중이던 차베스가 그를 후계자로 지목했고, 2013년 마두로는 대선에서 승리했다. 27년간 이어진 차베스·마두로의 좌파 포퓰리즘 실험은 철저하게 실패했다. 유가 하락으로 현금을 살포하는 퍼주기 복지는 지속하기 힘들었다. 가격 통제와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라는 반시장 정책으론 물가를 잡을 수 없었다. 2014~2020년 경제는 거덜났고, 민생이 고달파진 국민은 해외로 떠나갔다. 2017년 인구 약 3000만 명 가운데 4분의 3이 식량 부족으로 체중이 평균 8.7㎏ 줄었다는 외신 보도가 나올 정도였다. 나라는 망하고 국민은 힘들어도 “내가 차베스다”고 외치는 열혈 지지층과 차비스모(Chavismo, 차베스주의)가 여전한 것을 보면 포퓰리즘의 생존력은 무서울 지경이다.

김민석 국무총리(왼쪽 세번째)가 지난 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기획예산처 출범 현판식에 참석해 부처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좌파 포퓰리즘의 실패만 강조할 일은 아니다. ‘독재자’ 소리를 들었지만 차베스는 선거로 집권했다. 부정선거 비판이 나오는 마두로도 마찬가지다. 1992년 쿠데타에 실패해 2년간 옥살이까지 했던 차베스가 국민의 마음을 파고들 수 있던 것은 심각한 양극화라는 포퓰리즘의 온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보수를 떠나 어느 정부든지 사회의 양극화 해소를 위해 비상한 대응을 해야 한다.

포퓰리즘은 대증요법 같은 단기 대응에 신경을 많이 쓴다. 5년, 10년 뒤 우리 사회의 중장기 변화는 일단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지난 주말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정책 대안이나 비전을 추구하는 게 안 보인다”고 이재명 대통령의 리더십을 비판했다. 동감한다. 내년에도 확대 재정이라면 중장기 증세 계획이라도 내놓아야 한다. 경제가 선순환되면 세수가 늘어난다는 얘기만 자꾸 반복하는 건 무책임하다.



서경호([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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