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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보수의 정체성 혼란

중앙일보

2026.01.05 07:30 2026.01.05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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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준 국민대 미디어광고학부 교수
한국 정치가 12·3 계엄과 탄핵 문제라는 거대한 늪에서 3년째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다. 집권 2년 차를 맞이한 이재명 대통령은 새해 여론조사에서 지난 대선 득표율을 넘어서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민주당은 계엄과 탄핵 이슈를 발판 삼아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보수의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
지금 보수는 기득권 지키기 안주
국민의힘 대안정당 면모 안 보여
평등·참여 등 시대 요구 포용해야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운데)가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반면 야당인 국민의힘은 12·3 계엄이라는 굴레에 갇혀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있다. 윤 전 대통령을 배출한 정치적 책임이 발목을 잡고 있음에도, 국민이 납득할 만한 반성이나 쇄신은 보이지 않는다. 각 정파는 정치적 계산에 몰두하고 있으며, 급기야 서로의 허물을 탓하며 비난하는 소모적인 다툼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도부는 상황을 수습하거나 미래를 위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사적인 이익에 매몰된 나머지 공적인 대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 정당사에서 야당은 항상 당권을 놓고 치열하게 격돌해 왔다. 야당 지도자가 당권에 집착하는 이유는 당의 대표가 차기 대선 후보로 나설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당권은 공천권과 예산 배분권이라는 강력한 권한을 의미한다. 3김 시대를 포함해 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 정부 시절에도 야당은 늘 당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단순한 권력 투쟁을 넘어 국민에게 명확한 가치와 비전을 제시한 인물만이 진정한 정치 지도자로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국민의힘은 언제부턴가 대안 정당으로서의 면모를 잃어버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그 결과가 국민에게 어떤 보탬이 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상대를 악으로 몰아붙이는 관성적인 정치에만 매달릴 뿐, 시대의 변화를 이끌고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큰 정치’는 자취를 감췄다.

이 같은 혼란은 한국 보수정당의 태생과 정체성 문제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서구의 보수가 오랜 전통을 지키고 이를 현대에 맞게 계승하는 태도를 중시한다면, 한국의 보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반공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외부로부터 이식받으며 출발했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서구가 수백 년에 걸쳐 발전시킨 가치를 짧은 시간에 따라잡아야 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역사적 특수성을 안고 시작했다.

신생 대한민국은 냉전 질서 속에서 서구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보수주의는 과거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달성해야 할 목표’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상정하고 스스로를 정당화해야 하는 구조적 특징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태생적 배경이 오늘날 보수가 겪는 정체성 혼란의 뿌리가 되고 있다. 이로 인해 과거 보수 이념은 통치 수단으로 활용되며 국가주의·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기도 했고, 가치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무비판적으로 추종해 온 측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힘든 과정을 거쳐 탄생한 보수는 지금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심화시키기보다 기득권을 지키는 데 안주하는 모습이다. 외견상 기존 질서를 방어하는 서구식 보수주의를 닮아가고 있다. 고전적인 틀에 갇혀 평등과 분배, 참여와 공감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제대로 포용하지 못하고 있다. 권위적인 권력 행사에 안주하며 혁신을 주도하지 못한 결과, 보수는 낡은 수구(守舊) 세력이나 극단적인 집단으로 오해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9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내란 우두머리 혐의 속행 공판에 출석해 발언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제공
12·3 계엄에 대한 평가는 국민의힘의 보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결정적인 시험대다. 기존의 관행과 의리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바로 세울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공당이 이토록 중대한 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정하지 않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자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다.

논쟁의 핵심은 전임 대통령에 대한 평가다. 과거의 기득권을 옹호할 것인지, 보수 본연의 정체성을 회복할 것인지 갈림길에 서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과정이 정당하지 않으면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12·3 계엄은 무력을 동원해 헌정질서를 흔들려 한 반(反)자유민주주의적 행위였다. 탄핵 결정 이후에도 여전히 입장이 분분한 현실은 보수가 무엇을 지키고 무엇에 맞서는지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입장 정리를 미룰수록 정체성 회복의 기회는 사라진다. 가치 대신 이익을 앞세우는 관행에 머무는 것은 본질을 잊고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는 것과 같다. 지금 보수의 위기는 곧 가치와 정체성의 위기다.

한국행정연구원의 2024년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30.2%는 자신의 성향을 보수로 인식하고 있으며, 진보는 24.6%, 중도는 45.2%로 나타났다. 국민의힘의 정체성 혼란은 보수 진영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보수가 어떤 가치를 바로 세우고 지킬 것인가 하는 질문은 특정 정당의 문제를 넘어 자유민주주의의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손영준 국민대 미디어광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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