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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대한민국이 만들어야 할 ‘세 번째 한강의 기적’

중앙일보

2026.01.06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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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관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두 차례 ‘한강의 기적’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첫 번째 기적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고속 경제성장이었다. 그 이름은 서울의 중심을 관통하는 한강에서 따왔다. 전쟁의 폐허와 결핍의 시간을 지나 굶주림에서 벗어났다. 다리를 놓고 공장을 세우며, 내일을 오늘로 끌어당기던 숨 가쁜 시절을 살아냈다. 그 강의 이름으로 성장과 발전을 일궈냈고, 세계는 그것을 기적이라 불렀다.

경제 기적 이어 노벨문학상 기적
성장과 민주화는 상호 보완관계
속도와 존엄이 같이 가는 기적을

이 첫 번째 기적은 국부를 키우고 국민을 먹여 살렸다. 무너진 일상 위에 국가의 기틀을 다시 마련했다. 동시에 그 속도 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뒤처지는 아픔도 겪었다. 돌아보지 못한 얼굴들, 제때 보듬지 못한 상처들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도 이 기적의 일부였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한강을 소환했다. 이번에는 강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작가 한강은 인간의 폭력과 상처, 침묵과 존엄을 끝까지 외면하지 않았다. 그가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섰을 때 또 하나의 ‘한강의 기적’을 말하게 됐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이름으로 상징하는 기적이다. 두 번째 한강의 기적은 대한민국이 소득만 늘린 나라가 아니라 품격 있는 나라임을 세계에 알렸다. 이 기적도 홀로 완전할 수 없다. 깊은 사유는 있지만, 그것이 현실의 삶을 떠받칠 토대가 없다면 공허해질 수 있다.

오늘의 문제는 우리가 앞선 두 기적을 서로의 빈틈을 메우는 보완 관계로 보지 않고, 서로 대립하는 선택지로 오해해 왔다는 데 있다. 한쪽은 확장을 말하고, 다른 한쪽은 깊이를 말한다. 한쪽은 성과를 앞세우고, 다른 한쪽은 가치를 요구한다. 그 결과 성장을 말하면 민주화를 경시한다고 의심하고, 민주화를 말하면 성장을 부정한다고 낙인 찍는다. 이른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극한 대립은 두 기적을 모두 이뤄낸 우리의 모습에 비춰 보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상식의 눈으로 대한민국 현대사를 되짚어 보면 답은 분명해진다. 첫 번째 한강의 기적은 두 번째 한강의 기적이 필요했다. 속도는 방향이 필요했고, 성취는 의미가 필요했다. 두 번째 한강의 기적도 첫 번째 기적이 필요하다. 보살핌은 현실의 토대 위에서만 지속할 수 있고, 품위는 삶을 지탱하는 물질적 기반 없이 홀로 설 수 없다. 두 기적은 혼자로는 완결되지 못하는 기적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은 서로 다른 산에서 발원한다. 물빛도 다르고 유속도 다르다. 두 강은 각기 흘러왔지만,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에서 운명처럼 만난다. 두 강은 다투지 않는다. 어느 쪽이 더 옳은지, 어느 쪽이 더 많은 물을 가져왔는지 따지지 않는다. 혼자 흐를 때의 가벼움과 불안함을 내려놓고, 서로의 물을 받아들인다. 하나의 강, 한강이 된다. 그렇게 합쳐진 강은 혼자일 때보다 더 넓고 더 깊게 서해를 향해 나아간다. 마침내 태평양에 닿는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이념 논쟁이 아니다. 옳고 그름을 다투는 관념보다 중요한 것은 삶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실증에 기반을 둔 실용주의는 신념을 버리는 비겁한 태도가 아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미래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는 용감한 자세다. 과거의 공을 인정하고, 각자의 후회까지도 껴안으며, 무엇이 다음 세대를 위한 일인지 묻는 겸손한 태도다.

이제는 산업화의 언어가 민주화의 성과를 존중해야 하고, 민주화의 언어가 경제성장의 기여를 인정해야 한다. 둘은 경쟁자가 아니라 동반자다. 앞선 두 차례 한강의 기적이 하나의 물줄기로 합쳐질 때 비로소 세 번째 한강의 기적이 시작된다. 앞으로 나아감과 인간다운 존엄성이 같은 방향으로 함께 흐르는 기적이다.

우리는 다시 한강의 기적을 꿈꿀 자격이 있다. 이미 두 번이나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가능성을 입증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끊임없이 싸워 어느 한쪽의 승리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다. 축적의 기억과 성찰의 언어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 지속 가능한 미래를 펼쳐 나가는 일이다.

경제발전은 인간다움을 향해 고개를 낮추고, 인간다움은 경제발전을 현실 속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렇게 함께 흐를 때 우리는 더 멀리 더 힘차게 새로운 대항해에 나설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 남길 수 있는 가장 책임 있는 선택이자 시대적 의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류근관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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