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질서가 요동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평화를 지탱해 온 ‘팍스 아메리카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중이다. 자유무역을 토대로 구축된 글로벌 분업 시스템은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관세 장벽과 공급망 재편을 앞세운 미국 우선주의는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있으며, 신냉전 체제는 각국을 치열한 군비 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재가동하면서 불러온 나비효과이다.
기술이 생산의 도구인 시대 가고
지금은 기술이 곧 국방이자 경제
교육 시스템의 근본적 혁신 절실
이념 편향 벗어난 생존 전략 짜야
오늘날 세계는 기술 패권 전쟁이 한창이다. 최첨단 하이테크 기술은 이제 단순한 산업 생산의 도구가 아니다. 블록 경제와 집단 안보 시스템이 힘을 잃어가며, 하이테크가 곧 국방이고 경제이며 영토인 ‘기술 안보’와 ‘기술 주권’ 패러다임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 중심에는 인공지능(AI)이 자리 잡고 있다. 글로벌 테크 기업들은 자율주행, 로봇, 스마트 팩토리 등 현실 세계와 결합한 ‘피지컬 AI’를 향해 질주하고 있으며, 스스로 사고하는 범용인공지능(AGI)과 초지능(ASI) 시대도 머지않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보안 시스템을 무력화할 수 있는 양자 컴퓨팅의 발전, 달과 화성의 자원을 선점하려는 ‘뉴 스페이스’ 경쟁이 맞물려 인류 역사는 거대한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세계는 지금 디지털 문명을 선도하는 주권국이 되느냐, 아니면 타국의 기술에 종속된 ‘데이터 식민지’로 전락하느냐를 가르는 중대한 분기점에 서 있다.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공존하지만, 인류는 이미 엄청난 속도로 디지털 문명으로의 대이주를 감행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대결 구도로 고착화되었다. 인적·물적 자원이 풍부한 미국에 맞서, 중국은 국가 전략 목표를 향한 자원 결집력과 방대한 국가 핵심 데이터를 취합·관리하는 데 강점이 있다. 특히 군사, 행정, 금융, 의료는 물론 개인 생체 정보까지 신속하게 통합 운용하는 중국의 프로세스는 미국의 파워 엘리트들조차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위협적이다.
각자도생의 엄혹한 정세 속에서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안미경중(安美經中)은 이제 빛바랜 ‘동북아 균형자론’만큼이나 비현실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기술 후발 주자인 우리나라는 전쟁터에 나가는 비장한 각오로 대처해야 한다. 정부가 ‘AI 강국’을 외치고 있지만,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겠다는 획기적인 결단이나 디지털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전환은 여전히 미흡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무엇보다 절실한 과제는 교육 시스템의 근본적 혁신이다. 현재의 수능 문제를 AI가 푼다면 과연 몇 분이나 걸리겠는가. 정해진 정답을 빨리 맞히는 기능형 교육으로는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인재를 길러낼 수 없다. 자율성이 극도로 제한된 현실에서 단순히 서울대를 몇 개 더 만들겠다는 식의 방침이 과연 이 시대에 부합하는지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한다. 인재 양성에 국가적 사활을 거는 미국의 트렌드를 냉철하게 고찰해야 한다.
에너지와 인프라 확충도 시급한 문제다. 기가와트급 데이터센터를 가동하려면 전기와 물, 스피드가 필수적이다. 소형 모듈 원자로(SMR) 건설이 화급한 상황임에도, 우리는 재생 에너지냐 원전이냐를 두고 소모적인 논쟁만 거듭하고 있지 않은가. 정치권과 정부가 기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국가적 재앙이 초래 됨을 명심해야 한다.
실패를 용인하고 패자 부활을 허용하는 과감한 제도 개혁도 필수다. 국가의 발전은 사유재산과 지식재산권의 보호, 그리고 예측 가능한 정책 위에서 ‘창조적 파괴’와 ‘기술 혁신’이 촉진될 때 가속화된다. 창조와 혁신을 억압하고 기업가 정신을 위축시키는 후진적 규제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인재 유출과 국부 유출, 그리고 인구 절벽 등 고질적 위기는 이러한 제도적 결함이 쌓아 올린 산물이다.
결국 이 모든 파도를 넘어서는 일차적 요건은 지도자의 비전과 강력한 리더십이다.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에 충격받은 미국은 이를 도약의 계기로 삼아 1969년 인류의 족적을 달에 남긴 아폴로 11호의 기적을 일궈냈다. 당시의 쇼크를 각성과 도약의 순간인 ‘스푸트니크 모멘트(Sputnik Moment)’로 승화시킨 것은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국민적 역량을 하나로 결집한 리더의 역할이었다.
전환기에는 정확한 상황 인식과 냉철한 국제 정세 판단만이 국가적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이끌 수 있다. 2026년 새해를 맞이하는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절박한 것은 현실적이면서도 담대한 국가 전략과 국민적 용기다. 정파적 이해관계와 편향된 이념의 굴레에서 과감히 벗어나 하이테크 시대를 향한 생존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 백척간두의 위기 속에서 필사즉생(必死則生)의 자세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올해 우리가 마주한 대한민국의 운명적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