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에게는 루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형수였던 조세핀 황비가 나폴레옹과 결혼하기 전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오르탕스와 정략적으로 결혼했다. 양쪽이 모두 문란해 맞바람을 피웠다. 오르탕스가 아들을 낳았는데 생물학적 아버지가 수상이었던 탈레랑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어쨌든 오르탕스의 아들이 루이 나폴레옹 즉 나폴레옹 3세(1808~1873·사진)다.
백부이자 처조부인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하자 루이 나폴레옹은 스위스로 망명하여 나폴레옹 1세의 이름을 등에 업고 지냈다. 부르봉 왕조가 몰락하자(1830) 권력에 도전하다가 실패해 미국·영국·스위스로 전전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런던에 살면서 프랑스 의회의 의원으로 당선되어 화려하게 귀국하더니 곧이어 치러진 대선에서 승리해 대통령에 올랐다. 그러나 명성에 견주어 능력이 부족했던 그는 권위를 되찾으려고 나폴레옹 1세가 승리한 아우스터리츠 전쟁의 승전일(1805년 12월 2일)을 기념하는 날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1851)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나폴레옹 3세라 자칭하면서 황제에 올랐다. 그는 유럽의 영토가 좁다는 듯이 동방으로 진출해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를 점령하고, 중국에서는 제수이트 교파를 몰아내고 프랑스외방전교회를 파견했다. 그들은 막스 베버가 걱정했던 “전투적 교회(ecclesia militans)의 용사”가 되어 동방의 전통을 우상이라 지탄함으로써 조선의 천주교도 박해와 병인양요(1866)를 불러일으켰다. 나쁜 의미로서의 나비효과였다.
교만에 빠진 나폴레옹 3세는 1870년 독일(프로이센)의 침공을 받고 비스마르크의 포로가 되어 영국으로 추방되었다. 그의 말년은 초라했다. 요로 결석으로 병원에서 최후를 맞았다. 그가 임종한 침대 머리맡에 동양의 전쟁 고전 『손자병법』이 놓여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