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는 어떻게 지난해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삼성전자를 누르고 인공지능(AI) 시대 핵심 반도체인 HBM(고대역폭 메모리)의 최강자가 될 수 있었을까. 지난해 3분기 기준 SK하이닉스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57%. 2위인 삼성전자(22%)를 압도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올해 HBM4 양산을 통해 시장 점유율을 높여 SK하이닉스와 양강 구도까지 노린다는 계획이지만, 아직까지 HBM 시장의 표준을 쥐고 있는 SK하이닉스의 기술력과 선점효과 또한 만만치 않다. 2013년 당시 SK하이닉스는 차세대 먹거리 확보를 위해 AMD와 손을 잡고 세계 최초로 HBM을 개발한 반면, 삼성전자는 사업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HBM 개발에 소극적이었던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얘기다. 하지만 당시 HBM에 대한 두 회사의 판단과 결정이 달랐던 이유는 무엇이며, 이후 HBM 시장이 급성장하는 동안 삼성은 왜 계속 고전해왔는지 의문스럽다.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임원 출신인 양향자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그 이유와 의문을 기술경영학적으로 분석했다. 양 위원은 최근 SCI급 국제 학술지인 ‘어플라이드 사이언스(Applied Sciences)’에 ‘HBM에서의 수직적 통합과 수평적 통합, 그리고 시장 내재 가치평가’ (Vertical vs. Horizontal Integration in HBM and Market-Implied Valuation)라는 제목의 논문을 게재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HBM 개발 전략을 비교ㆍ분석한 논문이다. 양 위원은 논문에서 삼성전자가 그간 HBM 개발에서 SK하이닉스에 뒤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수직ㆍ폐쇄적 그룹구조와 경영문화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양 위원은 현재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aSSIST)에서 기술경영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최근 서울 여의도 한국경제인협회 회관에서 만난 그는 “삼성의 기술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술을 다루는 구조와 문화가 HBM이라는 산업의 속성과 맞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다행히 전영현 부회장 부임 이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하려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어 기대를 걸고 있다”고 덧붙였다.
양 위원은 그간 삼성에서의 경험과 인터뷰를 통해 논문의 가설을 세웠다. 삼성은 핵심 기술과 의사결정을 내부에서 통제하려는 수직적 구조를 유지해온 반면, SK하이닉스는 글로벌 고객사와 장비업체 등 외부 파트너와 문제를 조기에 공유하는 수평적 협업 구조를 보였을 것이며, 이러한 차이가 HBM 대응력과 시장 신호 포착 능력의 격차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실제 분석 결과는 이 가설을 뒷받침했다. SK하이닉스는 외부 파트너들과 실시간 공동 설계와 검증을 통해 기술적 병목을 초기에 해소한 반면, 삼성전자는 문제가 발생하면 다시 설계 단계로 되돌아가 수정하는 구조적 한계를 드러냈다. 이로 인해 리드타임(Lead Timeㆍ어떤 제품이나 공정을 시작해서 최종 결과가 나오기까지 걸리는 전체 시간)과 수율 대응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는 분석이다.
양 위원은 국내 언론에 보도된 HBM 관련 기사 약 11만 건을 수집해 텍스트 마이닝 기법으로 분석했다. HBM 관련 기사들을 선별한 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각 어떤 이슈로 언급됐는지를 월별로 정리했고, 기사 내용의 긍ㆍ부정 여부를 분류해 여론 흐름을 추적했다. 나아가 기사 문장들의 성격을 시각화한 결과, 두 회사 관련 보도가 명확히 다른 군집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 이렇게 도출된 이슈 강도가 실제 주가 변동과 어떤 상관관계를 보이는지도 수치 분석을 통해 검증했다.
양 위원은 양사의 개발 문화 차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지난해 2월 미국 출장 당시의 경험을 들었다. 실리콘밸리의 한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마주친 SK하이닉스 엔지니어들은 엔비디아와 TSMC, 장비업체 관계자들과 온종일 미팅을 진행한 뒤, 밤늦게까지 호텔에서 HBM3E의 발열과 수율 문제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공동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는 “이 장면이야말로 SK하이닉스가 수평적 에코시스템을 통해 성과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고 말했다. 반면 삼성전자에 대해서는 “핵심 기술을 사내에 편입하고 통제하려는 문화가 강해 ‘버티컬 엠파이어(Vertical Empireㆍ수직 제국)’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삼성전자가 HBM에서 뒤처진 원인으로는 최고경영진의 판단 미스, 이에 따른 관련 조직 축소 등이 거론돼 왔다. 양 위원은 이 같은 소문이 사실과 부합한다고 인정하면서도, 보다 구조적인 해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HBM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본 경영 판단으로 조직이 축소됐고, 그 과정에서 실망한 핵심 인력들이 SK로 옮겨간 사례가 실제로 있었다”며 “하지만 이는 단순한 인사 문제라기보다, 모든 것을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삼성 특유의 수직 통합 문화가 누적된 결과”라고 말했다. 내부 해결에 대한 자신감이 오만과 폐쇄성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HBM의 필요성을 과소평가하는 판단으로 연결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성전자는 앞으로도 HBM 경쟁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을까. 양 위원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는 “현재 삼성은 맹추격 중이지만, 수직 통합에 기반한 폐쇄적 개발 문화라는 구조적 한계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전영현 부회장 부임 이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기술력 자체는 삼성도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전략과 개발 방식이 전환된다면 충분히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으며, HBM4에서는 오히려 더 유리해질 가능성도 있다는 평가다.
양 위원은 삼성전자가 경쟁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개발 구조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병목이 발생하는 지점을 중심으로 제품 구조를 재설계하고, 설계 초기 단계부터 파트너와 문제를 공유해 열과 수율 리스크를 줄여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가 발생한 뒤 되돌아가 수정하는 방식으로는 개발 속도와 원가 경쟁력 모두에서 불리하다는 지적이다. 정량적 지표를 기반으로 병목 가능성을 조기에 관리하고, 필요한 영역에서는 과감하게 외부와 협업하는 문화로 전환해야만 HBM 시장에서 지속적인 대응이 가능하다는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