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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의 세사필담] 임기응변 정권

중앙일보

2026.01.19 07:28 2026.01.19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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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조폭 영화에나 나올 말이 패권국 수장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FAFO(Fuck Around and Find Out)! 까불면 죽는다는 뜻. 맞은 편 수장인 시진핑은 유교 나라의 후예답게 ‘100년 만의 변화’라고 점잖게 표현했다.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서라’고 한국 대통령에게 부탁 아닌 지시를 했는데, 김해 공항에서 찍었다는 트럼프의 FAFO 사진이 공개된 직후였다. 이재명 대통령이 화답한 ‘공자의 말씀’은 이세돌의 묘수였지만 ‘까불면 죽음’은 21세기 한국이 감내할 공포가 됐다. 까불다 죽는 일이 진짜 발생했기 때문이다.

까불면 죽는다는 트럼프 국제법
패권 경계선에 올라앉은 한국은
인적·지정학적 자원 부국 됐는데
주도면밀 기획 없는 항로 운항 중

20세기 후반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리비아의 카다피, 이라크의 후세인. 반미주의와 이슬람주의까지는 어쩔 수 없었는데 자원독점과 테러를 감행하자 미국의 인내가 깨졌다. 그런 미국이 제도 협약을 버리고 패권 위주로 전환한 계기는 2008년 금융위기. 마침 산업력 쇠퇴와 맞물려 전략을 바꿨다. 군사력으로 산업력을 장악하는 것, 자본과 기술공납을 거부하는 국가에 본때를 보여주는 것. 고율 관세 융단폭격에 세계가 납작 엎드렸다. 의기양양해진 트럼프는 66개 국제협약을 즉각 무효화하고 자신이 국제법임을 선언했다. 21세기 국제법의 명칭은 FAFO, ‘까불면 죽음’이다.

베네수엘라 마두로는 왜 그걸 무시했을까. 엎어지면 코 닿을 지척에서 트럼프를 조롱할 만큼 무모했을까. 3000억 배럴에 달하는 세계 최고의 유전을 송두리째 반납한 그 어리석은 짓을 왜 서슴지 않았을까. 중국과 러시아의 뒷배를 믿었던 거다. 남미의 오랜 폐습인 포퓰리즘의 매혹적 향기에 취해 몽롱한 춤을 추고 있었던 거다. 마두로는 벼락부자가 된 나라가 당하는 운명을 제대로 보여줬다.

1920년대 마라카이보와 에세퀴보강에서 발견된 유전은 베네수엘라를 일시에 자원 부국으로 끌어올렸다. 석유라는 20세기 흑진주를 국부(國富)로 만들려면 두 가지를 조심해야 했다. 국내 이권 투쟁과 강대국의 개입. 남미 지도자들은 권력 장악을 위해 포퓰라 섹터(빈곤층, 노동자, 농민)에 매수용 복지를 살포했고, 외국 자본과 부패 고리를 강화했다. 국부를 외국에 송출하거나 무상 복지로 흘려보낸 메커니즘이 곧 포퓰리즘이다. 개발방식과 이익분배에 불만을 품고 군부 쿠데타가 빈발했다. 1959년 쿠바 혁명 때까지 남미에서 140회 이상 쿠데타가 발생한 배경이다. 그나마 민주정치에 매달렸던 베네수엘라가 나락에 빠진 것은 차베스와 마두로의 포퓰리즘과 습관적 반미 기질 때문이었다. 좌파 포퓰리즘은 자원을 국민의 명약이 아니라 독약(毒藥)으로 만들었다.

한국은 자원 빈국이었다. 너무 멀었고, 너무도 가난해서 누구도 집적대지 않았다. 동양 끝자락에 ‘조용한 나라’가 있다는 소문을 따라 한번 와본 정도에 불과했다. 1816년 영국인 장교 홀(Basil Hall)이 해도(海圖) 작성 차 군산 앞바다에 왔다가 잠시 섬에 상륙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달아났는데, ‘사육장의 토끼들처럼 오두막으로 도망갔다’고 썼다. 지금의 고군산열도다. 50년 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신부 처형 문제를 따지려고 강화도 염하(鹽河)로 진입해 상륙했다. 궁핍한 마을에서 병사들이 발견한 것은 왕실 문서고. 한국은 문자만 먹고 사는 지식 국가였다는 말이다. 지식과 교육, 이게 20세기 산업의 최고 자원이 될 줄이야 그때는 예측할 수 없었다. 제국이 곧 눈뜬 것은 지정학적 자원. 러시아가 남하하자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했다. 제국의 눈에 조선은 대륙의 관문(entry port)이자 동양의 인후(咽喉), 일본 열도를 겨냥한 비수(匕首)였다.

한국은 식민지와 냉전을 거쳐 인적 자원과 지정학적 자원의 부국이 됐다. 온 겨레가 그토록 바랬던 석유가 안 난 것이 어쩌면 축복인지 모른다. 대신 6·25라는 이데올로기 대리전은 피할 수 없었다. 이 지정학적 운명 때문에 전운이 감도는 ‘패권 경계선’에 단짝 올라앉게 된 한국은 어떤 춤을 춰야 하는가? 마두로의 조롱춤은 죽음이다. 그러면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는 현 정권의 실용 춤사위가 답인가? 실용은 임기응변과 대책 없음의 다른 말이지 고뇌 끝에 도달한 최적의 전략은 아니다. 항해도는 물론 뚜렷한 국가 정책이 없다. 내란 청산과 부패 가리기에 올인할 뿐, 외교와 경제를 임기응변에 맡긴 채 내각은 존재감이 없고 미래 담론은 실종 상태다. 중환자가 된 의료와 교육엔 손도 못댔고, 민생은 거의 ‘법정 관리’ 수준.

중국의 AI 굴기가 한국을 저만치 따돌렸다. MAGA의 품에서 당분간 숨 고르기에 들어간 한국을 중국은 더 세게 압박해 올 것이다. 그저 인사치레였던 베이징과 도쿄 방문으론 경계선의 위험이 줄지 않는다. 집권 일 년이 다 돼가는데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국민은 모른다. 정권을 그토록 극적으로 뒤집었으면 글로벌 외교와 경제 성장의 분명한 청사진과 추진력을 보여 달라. 트럼프가 지난 100년 질서를 폐기처분 했다는데, 까불면 죽음이라는데.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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