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대본도 이렇게 쓰기는 쉽지 않을 거다. 삼성전자의 최근 ‘15개월 스토리’는 어지간한 반전 드라마 뺨친다.
먼저 올해, 영업이익 전망치가 평균 100조원이 넘는다. 씨티그룹은 155조원의 이익을 거둘 거라고 예측했다. 금고에 매일 4200억원씩 쌓인다는 얘기다. 주가는 22일 15만2300원으로 마감해 1년 새 세 배가 됐다. 인공지능(AI)발 반도체 수퍼 사이클의 위세다.
실적·주가 대반전 이룬 삼성전자
조직 문화, 실패 관리 돌아봐야
‘훈훈한 성적표=마취제’될 수도
불과 1년 반 전, 완전 싸했다. 모건스탠리는 ‘겨울이 임박했다(Winter looms)’고 리포트 제목을 뽑았다. 반도체 수요 둔화와 가격 하락을 예견하면서다. 사실은 삼성만 곤두박질하는 ‘나 홀로 겨울’이었다. 한수 아래로 여겼던 SK하이닉스가 젠슨 황의 엔비디아에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공급하면서 자존심을 크게 구겼다.
이즈음 ‘전영현 반성문’이 나왔다. 2024년 5월 삼성 반도체 수장(부회장)으로 긴급 투입된 지 5개월 만에 내놓은 입장문이다. 먼저 “송구하다”고 사과했다. “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자성했다. “기술의 근원적 경쟁력 복원”이 핵심 과제라고 짚었다. “조직문화도 바꾸겠다”고 다짐했다. 이례적인 공개 사과였다. 그래도 ‘반전이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이 남았다. 결과는 모두 아는 대로다.
여기서 질문 하나. 지금의 반전이 구조적인 회복인가, 아니면 ‘AI 순풍’에 올라탄 것인가. 대답은 ‘둘 다’이면서, ‘아직 모른다’다. 젠슨 황은 이달 초 “전 세계는 AI 팩토리가 더 많이 필요하다. 메모리 공급자가 매우 유리하다”고 했다. 메모리 기술과 양산능력에서 지존인 삼성전자에 기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삼성은 이날 “메모리 전 제품 가격을 최대 80% 인상한다”고 고객사에 ‘통보’했다. 수퍼을(乙) 아니면 못한다. 치욕이던 HBM에서도 와신상담 카드를 잡았다고 평가받는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에선 테슬라와 애플 같은 빅샷 고객을 유치했다.
그렇다고 ‘기술 초격차 복원’으로 판단하기엔 아직 이르다. 시장에 찬바람이 불 때, 빅테크들의 AI 인프라 증설 경쟁이 식고 수요가 줄어들면 ‘진짜 실력’이 드러날 것이다.
또 다른 포인트는 ‘메모리 부메랑’이다. 반도체 가격 상승이 정보기기 가격에 반영되고, 이걸 소비자가 체감하면 수요를 갉아먹을 것이란 우려다. 요새 신형 노트북 한 대에 500만원쯤이란다. 지난해보다 100만원 올랐다. 다음 달 선보이는 갤럭시S26도 가격 인상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가뜩이나 살림살이가 팍팍한데 지갑 열기가 버겁다.
변수는 또 생겼다. 미국과 관세 협상이 끝난 게 아니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은 지난주 “메모리칩을 생산하는 기업에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100% 관세를 내거나, 미국에서 생산하거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삼성, 하이닉스에 이어 메모리 3위인 마이크론이 투자한 뉴욕주 공장 기공식에서다. 전 세계 D램의 7할을 생산하는 한국이 협상 키를 쥐고 있지만, 이런 압박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이재명 대통령이 21일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옮기라고 하면 옮겨지느냐”며 선을 그었지만 ‘새만금 반도체공장 유치’ 같은 여의도발 이슈가 언제 또 튀어나올지 모른다. 한쪽은 구애일지 모르지만, 상대방에겐 겁박이 될 수 있다.
인재 유치는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의대 광풍으로 ‘10만 명 먹여 살리는’ 천재를 키우기도 쉽지 않지만, 천재 대접해 주기도 만만치 않아질 듯하다. 삼성전자 초기업노조 가입자는 6만 명이 코앞이다. 전체 직원(12만3000명)의 과반이 되면, 대표노조 지위가 생긴다. ‘영업이익의 10%’를 떼주는 하이닉스와 대조하면서 평등주의 성과급을 밀어붙일 태세다.
‘전영현 반성문’은 단순한 사과가 아니라 기술 전략과 조직문화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겠다는 신호였다. 숫자보다는 ‘그 속’이 중요하다. 소통 문화는 재건됐는지, 실패 관리는 진화했는지가 관건이다. 그런데 아랫목이 따뜻하면 사람은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훈훈한’ 성적표는 효과 좋은 마취제다. 내부 비판은 잦아들고, 경고음은 “분위기 흐리는 파열음” 취급된다.
하지만 기업사(史)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적자 수렁이 아니라 팡파르를 울릴 때였다. 하루아침에 사라진 노키아, 항공·에너지·의료 세 개 회사로 쪼개진 GE가 그랬다. 기세가 한창 오른 오늘 ‘전영현 반성문’을 다시 꺼내봐야 하는 이유다.
정부와 정치권의 역할도 분명하다. 관세 압박을 방어하고, 기술 전쟁에서 이길 전사를 기르는 데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지금처럼 ‘내 앞마당으로 오세요’만 고집하다간 나중에 아무 소용 없는 ‘넋두리 반성문’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