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당분간 통화정책에서 ‘신중한 중립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밝히면서, 물가 상승(인플레이션)에 대한 경계의 끈은 더욱 단단히 조였다. 세계 경제를 둘러싼 물가 위험이 여전히 크다는 판단이다.
한은이 12일 발표한 ‘통화신용정책보고서’에서 “통화정책은 특정 방향의 기대를 형성하기보다 대내외 여건 변화와 경제지표 흐름을 지켜보며 신중한 중립 기조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지난해 8월 이후 통화정책 운영 상황과 최근 정책 환경 변화를 정리한 것이다.
국내 경제는 물가와 성장 모두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목표 수준인 2%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소비 회복과 반도체 중심의 수출 호조 영향으로 성장도 예상보다 양호한 개선세를 보인다는 분석이다. 이런 이유로 한은은 지난해 5월 이후 기준금리를 연 2.50%로 여섯 차례 연속 동결했다.
다만 한은은 보고서 곳곳에서 전 세계 인플레이션 위험에 대한 경계를 드러냈다. 주요국 성장세가 예상보다 양호한 데다 확장적 재정정책이 이어질 경우 수요 측면에서 물가 압력이 다시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다. 또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에 따른 반도체·에너지·금속 수요 증가와 중동 지역 긴장에 따른 국제유가 상승도 물가 상방 요인으로 지목했다.
이번 보고서 작성을 주관한 황건일 금융통화위원은 “3월 들어 중동지역 분쟁 등 지정학적 리스크로 금융·외환시장 변동성이 크게 확대됐다”며 “금리와 환율이 중동 리스크로 경제 펀더멘털과 괴리된 높은 변동성을 보일 수 있는 만큼 필요할 경우 시장 안정화 조치를 통해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은은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1%포인트 상승하면 국내 물가도 약 0.2%포인트 오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환율 역시 주요 변수로 제시됐다. 한은은 “달러 수급이 개선되면서 원화 약세 압력이 점차 완화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도 “엔화 등 주변국 통화 움직임에 따라 원화 변동성이 확대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짚었다. 실제 지난해 하반기 원화와 엔화의 환율 동조 정도를 나타내는 상관계수는 0.53으로 상반기(0.35)보다 크게 높아졌다.
시장에서는 한은이 당분간 금리 인하에 나서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해석한다. 오히려 중동 전쟁 장기화로 유가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질 경우 통화정책이 다시 긴축으로 전환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박종우 한은 부총재보는 “현재는 중동리스크로 유가 등 비용 측면에서 물가 상승 요인이 있는데, 장기간 지속하면 기대인플레이션에 영향을 미치고 2차 파급효과를 통해 이를 가속할 수 있다”며 “결국 중요한 것은 충격의 크기보다 얼마나 오래 지속하느냐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다음 달 통화정책방향 회의까지 성장·물가 등 영향을 점검해서 통화정책을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